2012-09-20

자발적 가난을 서약하라

미국의 유명한 운동화 업체인 LA 기어의 고위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용도에 맞는 신발을 신는다면, 아마 당신은 한두 켤레의 신발만 있으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패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아마 몇천 켤레의 신발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 한국인들은 아이들의 책을 구입하는 데 쓰는 비용의 몇 배나 되는 돈을 아이들의 신발을 구입하는 데 쓴다.(49)

녹색 시민 구보 씨의 하루/존 라이언, 앨렌 테인 더닝/그물코 20020305 137쪽 8000원


일상용품의 비밀스러운 삶을 아시나요? 우리가 매일 신고 다니는 신발 한 켤레를 봅시다. 텍사스의 한 목장에서 도살된 소에서 벗긴 가죽은 환경 규제가 엄격하지 않은 한국으로 옵니다. 강력한 화학 약품을 이용해 부드럽게 만든 가죽은 자카르타로 보내집니다. 가죽을 제외하면 유독성 물질인 석유화학 물질로 만들어졌습니다. 밑창에 대는 고무는 벤젠 합성물입니다. 대만에서 만들어 자카르타로 운반됩니다. 수백 명의 자카르타 여인들은 실내 기온이 섭씨 40도 가까이 올라가고 페인트와 본드 냄새가 진동하는 공장에서 가죽을 수작업으로 이어 붙입니다. 그들이 만든 8만 원짜리 신발 한 켤레 값은 한 달 월급보다 더 많습니다. 조립이 끝난 신발은 수마트라 섬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종이로 채워져 뉴멕시코의 제지 공장에서 만든 상자에 담겨 팔려갑니다.

커피, 신문, 티셔츠, 햄버거, 콜라 같이 우리가 늘 사용하거나 먹는 일상용품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동안 일어나는 노동 착취와 환경 파괴에 관해 알기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확량을 늘이기 위해 나무를 잘라낸 커피 경작지로 인해 95퍼센트의 새들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당신이 마실 커피 열매는 하루에 천 원도 벌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손으로 따고 있습니다.

만약에 지구상에 인간들의 수가 이렇게 많지 않고, 또 이렇게 빨리 소비해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구가 처리할 수 있는 양 이상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40분 동안 내리쬐는 햇볕은 1년 동안 화석 연료에서 얻은 에너지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빨래는 빨랫줄을 이용해 햇볕에 말리자는 녹색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 줍니다. 소비가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알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여 흔적을 남기지 말자고 합니다.

이런 쓸데없는 포스팅을 하는 동안 화력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사용하고, 그 때문에 발생한 유해 가스가 얼마나 지구를 오염시켰을지 송구스러워집니다.

2012-09-15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

철새는 따로 집이 없다. 날마다 도착하는 그 모든 곳이 바로 집이기 때문이다. 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 사실을 알아채고 따라하는 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누구나 그럴 듯한 집 한채 장만하는 게 간절한 소망이겠지만,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욕망 때문에 인생의 대부분을 허비하고 말 것인가.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텃새처럼, 아니 이미 새가 아닌 닭처럼 철망 속의 둥지에 깃들어 살 것이냐, 철새처럼 풍찬노숙의 길을 갈 것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어차피 집과 집을 이으면 길이 되고 그 길의 마지막 집은 무덤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이라는 해괴한 물건(?)을 포기했다. 버렸다. 패대기쳤다. 이 세상의 모든 집을 안식처가 아니라 과정의 길로 만들고 싶었다.(150)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이원규/오픈하우스 20110909 319쪽 13800원


거주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투전판으로 변한 집. 크던 작던 우리의 욕망이 유착됐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집으로 신분과 계급을 나눕니다. 어디 사느냐는 물음으로 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이런 시대에 철새처럼 사는 이는 신기함을 넘어 도인의 경지로 보입니다. 경외심이 듭니다. 닮고 싶습니다.

지리산 낙장불입 시인 이원규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합니다. 죽어가는 4대강이 있어 슬프지만 그럴수록 향기나는 사람들 때문에 살 만한 곳이라고 합니다. '집과 집을 이으면 길'이 아니라 '길이 곧 집'이었다고 합니다.

2012-09-14

노블레스 오블리주

6.25 전쟁은 지난 세기 냉전시대의 서막을 연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목격할 수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중공군 통역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 최고 권력자 모택동 주석의 큰아들 모안영.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상황. 한참 신혼에 젖어 있던 모안용에게 전쟁 참여를 권유한 이는 바로 아버지 모택동이었다. "내 아들이 가지 않으면 누구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모안용은 6.25 전쟁에 참전한 지 한 달여 만에 평안북도에서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전사하고 만다. 당시 중공군 수뇌부는 최고 권력자의 큰아들이었던 모안용의 시신을 본국으로 후송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중공군의 관례대로 다른 인민군과 함께 묻히는 것이 도리라며 거절한다. "내 아들만 데려오면 다른 아들들은 어찌하느냐. 내 아들도 조선에 묻어라." 결국 모안용의 유해는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안장된다.

로마의 귀족층에서 시작된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는 훗날 서구 사회 지도층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됐다. 제2차 대전 때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당시 공주 신분) 수송부대 하사관으로 군복무.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6.25 전쟁 당시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천됐다. 그 주인공은 바로 미국 현역 장군들의 아들들. 초대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육군 대위 등 장군의 아들 142명 6.25 전쟁에 참전.

미국 2차 대전의 영웅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도 미3사단 최전방 대대장으로 전투를 하게 됐다. 아들이 참전의사를 밝혔을 때 대부분의 부모들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예외였다. 아들은 자신의 한국전 참전을 반대하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고개를 저은 아버지.
- 네가 전사하면 우리 가족의 비극으로 남게 되지만 네가 포로가 될 경우, 전쟁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아들이 고집을 꺾지 않자 아버지는 조건부 허락을 해준다.
- 만에 하나 포로로 붙잡히면 자결토록 하라.
결국 아들 존은 아버지 아이젠하워에게 자결 각서를 써주고 한국 전선으로 떠난다.

전쟁의 참혹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참전을 결정한 대통령의 아들을 비롯한 142명 장군의 아들들. 그리고 그 치열한 전장에서 자신의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배치할 수 있었음에도 생과 사가 엇갈리는 최전선으로 배치한 아버지들.

장군의 아들 142명 중 사망, 실종, 중상자 총35명. 일반 군인들 전사율 8%, 장군의 아들 전사율 25%.

1952년 4월 4일 오전 10시 30분. 아들의 실종을 보고받은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명령.
- 지미 밴 플리트 2세 공군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업은 너무 무모하다.
1952년 4월 4일 미공군중위 지미 밴 플리트 2세 한국에서 실종.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전쟁에서 전사 혹은 실종된 군인 가족에게 보낸 편지.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신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위대한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강원민방 G1에서 방영하는 DMZ 스토리 중 『부자(父子)의 전쟁』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접어두더라도 비상식이 상식으로 둔갑해 판을 치는 지금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2012-09-08

오랜 친구

오랜 친구라는 거 아니에요? 개인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확대해석하는 건 저는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안철수 원장이 대선에 출마하면 뇌물과 여자 문제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는 기자회견에 대한 박근혜의 대답입니다. 협박을 할만한 위치가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새누리당 대변인은 "친구 사이 이야기를 갖고 새누리당이 정치공작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금 변호사야말로 구시대적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금태섭 변호사를 '의리 없는 친구'라고 합니다.

전화 통화를 한 둘은 친구 사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남의 얘기를 나누고 나서 뒷말이 무성한 걸 보니 둘은 친구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한쪽은 친구 사이 통화라 하고 한쪽은 협박이라고 하니 밤길 조심하라는 말을 엄마와 조폭에게서 들은 것처럼 차이가 납니다.

친구에 대한 정의야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유안진 시인은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 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김치 냄새 풍기며 난닝구 차림으로 친구를 찾아가는 모습을 천천히 그려보면 시나브로 풍족해지는 걸 느낍니다. 서로 한 번 뜨고 한 번 가라앉아 보며 고독을 나눴던 친구일 테니까요. 저녁에 쐬주라도 한잔하자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으며 지갑에 얼마가 있나 확인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요. 달빛 받으며 돌아가는 등에 대고 밤길 조심하라며 육두문자를 붙이는 그런 친구니까요.

쓰레빠 끌고 오일장에서 산 허름한 반바지를 입고 막걸리 마시자며 찾아오는 그런 친구인지 돌아보는 계절입니다.

2012-09-06

시민의 필수 덕목은 균형감각

돈과 권력에 맛들인 사람들이 국회를 장악하면, 그들 자신에게 유리한 법률이 만들어집니다. 그 사람들이 법을 집행하면 역시 비슷한 사람들에게 편파적으로 유리한 재판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런 씨스템화된 편파성에 분노해 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한 '피해자가 불분명한' 범죄들에 과도하게 분노하며 돌멩이를 손에 듭니다. 그래서 공직자가 학력을 위조한 젊은 여교수와 바람이 났다든지, 유명가수가 대마초를 피우다 걸렸다든지, 개그맨이 해외에서 상습도박을 하다 붙잡혔다든지 하는 '스캔들'이 주로 돌을 맞습니다. 인터넷 뉴스기사의 클릭 수도 권력형 비리보다 이런 스캔들이 훨씬 많습니다. 해고노동자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현실보다는 여배우의 사생활이 담긴 동영상 하나가 백배의 관심을 끕니다. (...)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스캔들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분산시킵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을 뽑는 선거시기가 다가올수록, 시민들은 '누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한데, 그런 때일수록 유난히 더 많은 스캔들이 터집니다. 매사에 음모론을 갖다 붙일 필요는 없지만, 아무 때나 터져나오는 스캔들에 휘둘리지 않는 균형감각을 갖추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의 필수적인 덕목입니다.(264)

욕망해도 괜찮아/김두식/창비 20120521 310쪽 13500원


오늘 뇌물과 여자문제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안철수 원장의 대선 불출마를 종용했다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협박한 측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며 맞받아칩니다. 뇌물과 여자문제는 우리가 혹할만한 스캔들입니다. 매스컴이 기계적 중립을 지키며 보도한다고 해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며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부풀려지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어느 뉴스에 나온 앵커는 친구에게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다 사달이 났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더군요. 어느 분 말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꼴입니다.

균형감각을 넘어 행간을 읽는 지혜로운 시민이 다수가 돼야 할 때입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