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26

글쟁이로 살아가는 법

  • 정작 그는 "글쓰기에 있어 아름다움을 전혀 중시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형용사와 부사를 최대한 줄이고, 접속사를 피해 문장을 나눈다. 그가 글 쓸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글의 리듬, 그리고 언어의 경제성이다.(14)
  • 글쓰기 조언을 할 때 "글에서 부사와 형용사를 30퍼센트 정도만 줄여보라"고 늘 말한다. 글쓰기는 전달력이 중요한데, 이 전달력은 문장을 줄일수록 늘어난다는 점이 그의 글쓰기 지론이자 글 잘 쓴다는 말을 듣는 비결이다.(22)
  • 미술이 좋아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도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었고, 그런 진정성을 독자들도 글 속에서 감지하고 호응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는 자기가 쓰고 싶은 책보다도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책을 써야 한다는 의식이 확고하다.(35)
  • 이씨는 마감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기 마련인 대부분의 필자들과 달리 원고 기한을 어기는 법이 없다. 자기 일정과 작업량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마감을 정하기 때문이다. "책도 상품인데 아이스크림을 겨울에 낼 수는 없잖냐"며 이씨는 웃었다.(51)
  • 공씨는 글쓰기 자체에는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목표하지 않는다. 그래서 완성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비난도 듣는다. "글쓰기는 골프와 비슷해요. 너무 잘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땅을 때리기 쉽습니다. 제 글쓰기 원칙이 있다면 대화하듯 편안하게 풀자는 거예요. 책이 무게가 떨어진다고 비난해도 상관없어요. 그런 비난을 두려워하는 순간 책은 나올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니까."(111)
  • 자료가 중요하다 보니 답사나 여행에도 요령이 생겼다. 길을 나설 때 반드시 빈 바인더나 클리어파일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현지에서 거저 구할 수 있는 모든 서류-관광안내서, 교통시간표, 홍보용 전단, 어촌계 서류 등-를 모조리 집어넣는다. 여기에 짬짬이 적은 메모까지 넣어 돌아오면 여행 한 번에 자료철 한 권이 생긴다.(140)
  • 책의 제목에 대한 아이디어부터 각종 카피 글귀, 구성도 등 다양한 것들에 대한 메모가 가득했다. 사소한 자기 생각들을 챙기는 것이 바로 저술의 시작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147)
  • 임 교수의 자료철학은 '눈덩이론'이다. "자료는 눈덩어리 같아서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야 굴러가요. 물론 사놓고 평생 안 볼 책도 있지요. 그런데 그걸 버리면 나머지 자료들도 같이 죽어요. 경영효율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학문적으로는 그래요. 자료가 많아지면 생각이 넓어지는 효과가 있어요. 자료가 오히려 연구주제를 넓혀주기도 하는 거죠."(169)
  • 팩트는 힘이 세다. 그러나 팩트 자체로는 팔리지 않는다. 팩트는 이야기가 될 때 팔린다. 이게 바로 기자는 돈을 못 벌고 작가는 돈을 버는 이유다. 미국 사람들이 하는 말 그대로 "Facts tell, stories sell"이다. 팩트라는 구슬을 꿰는 것, 그걸 잘하는 게 저술가다.(207)
  • 우리는 '글쟁이'라고 하면 소설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인쇄되어 나오는 세상의 글 속에서 소설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실제 존재하는 생각과 정보를 담아낸 글이 우리가 보는 글의,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글을 쓰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글 하나로 먹고 사는 이들, 또는 글로만 먹고살지는 않아도 글쓰기가 삶의 중심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글쟁이, 저술가다.(243)
  • 우리의 눈에는 학자들의 탁월한 논문과 저널리스트들의 훌륭한 특종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 시대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대중에게 이야기해주는 저술가들의 책일 수 있다. (...) 세상은 그래서 저술가를 필요로 한다.(247)
한국의 글쟁이들/구본준/한겨레출판 20080811 248쪽 11000원

글 하나로 먹고사는 글쟁이들 이야기입니다. 얼굴은 작은데 머리가 크고, 키는 큰데 다리가 짧은 한겨레신문사 구본준 기자가 만났습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글만 써서 먹고 살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소설이 아닌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열여덟 명의 글쟁이들이 각자 책 쓰는 요령을 귀띔해줍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글쟁이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통입니다. 역사 저술가 이덕일 씨가 소통을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책도 상품인데 아이스크림을 겨울에 낼 수는 없다." 글쟁이는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책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논문이나 기사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죠.

글쟁이들은 나름대로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런 자료가 바탕이 되어 독자들이 원하는 책을 씁니다. 하나쯤은 배워서 습관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인 구본준 기자는 땅콩집에 사는 걸로 유명합니다. 블로그에 가면 취미를 넘어선 '거리 가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최근 개차반만도 못한 놈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말뚝을 박았던‎ '한국에서 가장 눈물 나는 집' 이야기를 들어보길 추천합니다.

2012-06-23

악마기자가 살아가는 법

  • 나는 모범생은 아니었다(4)
  • 나는 중립, 균형을 찾기보다 편파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겠다. 내가 이런다고 약자들이 이기지도 못한다. 세상이 바뀌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힘을 함부로 쓰는 자들에게 짱돌을 계속 던질 것이다.(7)
  • 판검사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계급이라고 생각한다. 판사들은 세상에 판사가 있고 일반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검사들은 세상에 판검사가 있고 일반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판사는 검사를 무시하고, 검사는 판사를 시기한다. 판검사 모두 승진에 목숨 거는데 판사는 법복을 벗는 것을 두려워하고, 검사는 정치권으로 갈 궁리를 많이 한다.(33)
  • 나는 모든 기사를 소송을 생각하고 쓴다. 기사가 나간 뒤 항의 오고 욕하는 전화가 오면, '아, 이번엔 잘 썼군. 괜찮았군' 이렇게 생각한다.(63)
  •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스티븐 와이버그는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일을 하는 좋은 사람과 악한 일을 하는 나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분석이 한국 사회, 우리 종교계의 단면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106)
  • 내 월급은 기사 써서 받는 돈 20퍼센트, 사회에 보탬 되는 일 하고 받는 돈 30퍼센트, 나머지 50퍼센트는 약자 얘기 들어주는 것으로 받는 돈이라고 생각한 게 그때였다.(134)
  • 간혹 그들의 하소연이 기사를 통해 나가더라도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사실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냥 같이 욕하고, 전화 한 통 해주는 게 그들을 위한 내 역할이다.(135)
  • 나는 조선일보를 깔때기라고 했다. (...) 그들은 팩트를 보도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기사로 만든다.(155)
  •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밥 먹는 것보다 더 많이 하고 있다. 또 이명박 씨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하는데 '짠돌이' 이명박 씨가 그럴 리 없다.(175)
  • 이명박 정부를 잉태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장 큰 과오가 됐다.(238)
  • 깨지고 부서지더라도 충동을 믿고 도전하겠다. 강자에게는 당당함으로, 약자에게는 겸손함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겠다. 이상과 정의 그리고 진실을 위해서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겠다.(345)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기자/주진우/푸른숲 20120329 346쪽 13500원

나꼼수 덕에 알게 됐습니다. 누나와 삼성, 종교 전문기자가 있다는 걸 말이죠. 항의 전화가 오고 욕을 먹어야 괜찮은 기사를 썼고, 소송을 생각하며 기사를 쓰는 기자가 있다는 것을요.

주기자가 받는 월급의 반은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같이 욕이라도 해서 받는 돈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약자를 위해 편파적으로 기사를 쓴다고 합니다. 그동안 뒷골목 탐정처럼 쓴 기사와 팩트 그리고 꼼꼼한 뒷얘기를 이야기하지만 아직 밝히지 못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걸리면 끝까지 파헤치는 악마기자가 요즘은 박근혜를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 길이 '꽃길이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꼼꼼한 가카 시대에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짱돌을 던지는 그를 응원합니다. 그리하여 주기자 활극이 아주 심심하게 들리는 세상이 어여 왔으면 좋겠습니다.

2012-06-21

앨리스가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를 알려주마

왜 GDP는 높아지는데 앨리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질까요? 국회의원들이 매년 재산을 공개하지요. 그런데 의원들 재산이 땡전 한 푼 없다고 하더라도 3조 원에 이르는 정몽준 때문에 국회의원 평균 재산 보유액은 100억 원이 됩니다. '정몽준 효과'라고 합니다. GDP도 마찬가지랍니다. '억만장자가 늘어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오르는 경제와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경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런 내용을 GDP는 빠뜨린다. 그러다 보면 경제는 자꾸만 왜곡되는데 측정되는 성과는 좋아지는 역설이 나타(204)' 나겠지요. 그래서 국민소득은 올라가고 경제는 좋아진다는데 앨리스는 행복해지지 않는 거죠.

앨리스가 지금까지 배운 경제학은 '시장에서는 모두가 이기심을 추구하면 결과적으로 가장 큰 효율성이 달성된다는 것(11)'이었습니다. '경제가 이기심에 기초해 운영된다고 이야기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이기심이 공익을 불러온다(165)'는 애덤 스미스의 경제 윤리였던 겁니다. 그리하여 IMF 이후 '기업은 탐욕을 실천해야 하므로 냉혈한이 되어야 한다. 경영자는 때로는 불법도 저지르고, 때로는 사람을 냉정하게 해고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기심이 결국 시장경제를 지탱하므로, 냉혈한이 오히려 윤리적이다. 이 프레임 아래서 기업의 이타심은 오히려 비윤리적(150)'으로 여겨지며 경제 성장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 휩쓸고 갔을 때 우리는 모두 가난했습니다. 이때는 '역설적으로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평등했고, 기회가 상대적으로 균등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자수성가의 꿈이 있었던 시대이다. 경제 성장의 출발선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122)'이었습니다. 그러나 탐욕의 경제학은 '공유지의 비극'을 부르게 됐습니다.

바닷속 물고기는 공유자원이다.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그런데 어부들은 이 자원을 획득해 사적 소득을 올린다. 전통적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남획 문제가 생긴다. 즉 바닷속 물고기는 공유자원이기 때문에 어부 입장에서는 보호할 이유가 없다. 많이 잡을수록 자신에게 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어장 전체를 보면 다르다. 매년 산란되는 물고기 개체 수 이상을 잡게 되면 전체 개체 수가 줄어든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장 자체가 존립하기 어려워지고 산업 전체가 무너진다. (...) 이 현상을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설명한다. 소를 키우는 마을에서 목초지가 공유지인 경우, 소 주인들이 자기 소에게 먼저 더 많은 풀을 먹이려고 하다가 결국 목초지가 황무지로 변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탐욕에 기초한 경제에서 벌어지는 공유자원의 훼손 문제를 다룬 이론이다.(89)

요즘 앨리스는 상사 눈치를 보면서 부쩍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올 연말을 기점으로 아날로그 방송이 종료되고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된다고 해서 테레비를 새로 사려고요. 지금 있는 테레비도 아직 쓸만하지만 이참에 화면이 더 넓은 걸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런데 앨리스는 기업과 국가가 결탁한 꼼수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기업이 교체 수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의 핵심이 바로 계획적 진부화다.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이 낡은 것으로 느껴지게 만들어, 교체 수요를 만들어내는 제조업의 전략(187)'인 줄은 꿈에도 모릅니다. '휴대전화가 여전히 쓸만하지만, 인터넷을 추가로 이용하기 위해 새 제품을 구매'하거나 '기능은 같지만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면서 기존 제품을 구식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188)'처럼요.

어느 날 앨리스는 직장 상사에게 엄청 깨졌습니다. 상사는 사장님에게 당하고 왔을 테고, '사장님은 납품 대기업의 젊은 대리에게 쓴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 대리 위에는 다시 부장과 임원과 실적 나쁘면 바로 쫓겨날 형편인 사장'이 있겠지요. 모두가 쫓기는 게임, 그 마지막에는 '주주'가 있을 것이고요. 그 주주 중엔 앨리스 월급에서 꼬박꼬박 떼어가던 국민연금도 있습니다. '투자자로서 무언가를 요청하면 기업이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앨리스의 미래 생활비를 맡아 관리하는 기관이 동시에 앨리스의 현재를 압박할 수 있는 모양새입니다. '국민연금이 단기 수익률을 높이는 데만 급급하면, 정작 현재의 안정성을 해칠 수도 있다(294)'는 우스꽝스럽지만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상은 한겨레경제연구소 이원재 소장이 쓴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을 통해 본 이상한 나라에 사는 앨리스의 얘기였습니다. 앨리스는 '1명의 경제를 자신의 경제로 착각하는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경제에서 주인공은 1명뿐이다. 나머지 99명은, 자신의 삶과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는 1명을 열심히 응원하는 관객(8)'이라는 걸 알려줍니다. 저자는 '고성장 시대에서 저성장 시대로 진입하는 게 아니다. 성장 중독 시대에서 탈성장 시대로 진화하는 것(214)'으로 사고방식을 바꾸면 프레임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상한 나라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이타심을 근본으로 하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을 제시합니다. 탐욕의 시대에서 협동과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가 새로운 동력원임을 알려줍니다.

선한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는 이상한 공식은 이제 깨져야 한다. 경쟁하면 이기고 협력하면 진다는 이상한 경제는 넘어서야 한다. 최소한 생활 경제,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는 그렇다. 선한 사람이 성공하는 경제, 선한 사람이 많은 경제가 성공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이상한 나라를 탈출하는 방법이다.(306)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이원재/어크로스 20120220 312쪽 14000원

2012-06-15

벼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나라, 라오스

  • 나와 같은 뭇 여행자들이 라오스에 끌렸던 것은 그곳에 특별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며 효율적인 것을 선호하는 직선의 세상에서,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세상이 그리웠던 것일 테다.(11)
  • 때로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국인과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할 때가 있다. 언어에 얽매이지 않고, 언어로 표장하지 않고 마음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37)
  • 세상은 다행히 시인과 나그네에게 관대하고, 길 위에서의 어려움은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두려움 대신 여행에 필요한 것은 계산하지 않고 단순해지기, 오직 그것이었다.(47)
  • 여행을 하다 보면 낯선 타국에서 오히려 고향을 느낄 때가 있다. 편안하고 아련한 느낌. 어느 때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라오스가 그런 곳이다.(119)
  • 만약 어느 여행자가 어느 한 도시의 진정한 매력을 알고 싶다면, 그는 우선 이른 새벽 거리로 나서 보아야 한다. 잠이 덜 깬 도시의 맨얼굴이 그곳에 있기 마련이다.(130)
  • 생각해 보면, 난 배낭의 무게가 내 어깨를 묵직하게 잡아 주는 그 순간, 그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다.(153)
  • 아무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속도는 시속 4킬로미터의 세상이다. 발뒤꿈치만 살짝 들어도 담장 너머에 널어 둔 빨래와 대바구니 안에 잠든 아기와 모이를 쫓아다니는 닭들의 세계가 다 들여다보이는 속도가 시속 4킬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가끔 예기치 않은 만남을 가져다주는 속도이기도 하다.(171)
  • 베트남 사람들이 벼를 심는다면, 캄보디아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것을 보고, 라오스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251)
  • 굳이 말하자면 여행이란 삶의 속도가 주는 '다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279)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김향미, 양학용/좋은생각 20110926 287쪽 13000원

옥수수를 파는 꼬마의 미소가 예뻐 그 미소를 한 번 더 보려고 옥수수를 또 주문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는 곳, 새벽 공양 음식은 시민들의 손에서 스님들의 발우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거리의 아이들 빈 대나무 밥그릇을 채우며 돌고 도는 곳이 라오스다. 이웃 사람이 벼가 익었다고 알려 주기 전에는 논에 한 번도 나가 보지 않는다는 라오스 사람들이 빠르게 생활하는 직선의 세상 사람들 눈에는 게으르고 답답하다고 한다. 여행자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잠시 현실을 못 본 척하면 배고팠지만 팍팍하지 않았던 아련한 고향의 추억을 만날 수 있다.

전세금을 빼 967일간 47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부부가 다시 떠난 라오스 여행기. 2008년 뉴욕 타임즈가 꼭 가봐야 할 나라 1위로 선정한 나라, 라오스. 표지 뒷면에 적힌 "관광하려면 태국으로 가고, 유적지를 보려면 미얀마로 가고, 사람을 만나려면 라오스로 가라"는 말처럼 직선을 선호하는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라오스가 끌렸다는 저자를 시속 4킬로미터로 뒤따라 가며 음미하다 보면 문자 메세지 알림음에 화들짝 놀란다. 손전화를 집어던지고 맨발로 논두렁을 걷고 싶어진다.

2012-06-14

진보, 알리바이 담론은 집어치워라

  •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민주주의를 직접 공격하진 못한다. 대신 그들은 정치와 정당, 정치가를 욕하고 비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위력을 무력화시키고자 한다.(17)
  •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의 매력을 갖는 데 소홀하다면 그것은 진보의 독선은 될지언정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인간적으로 친화성을 넓히는 데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25)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날 한국 정치가 안고 있는 비극성의 기원은, 제대로 된 정치가의 부재에 있지, 정치가의 힘든 처지를 이해 못하는 시민에게 있는 것 같지는 않다.(43)
  • 타협이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타협"일 것이다.(60)
  • 분노와 열정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가장 근복적인 에너지라 할지라도, 그래도 뭔가 가치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으려면 이성과 합리성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65)
  • 이념도 정치도 운동도 아이들이 웃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67)
  • 민주주의가 사회적 합의에 가까운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러서다. 다시 말해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뒤이은 세계대전의 비극적 경험을 거치고 나서야 "좌파는 혁명을 포기하고 우파는 착취를 포기하는 길"을 받아들였고 그 위에서 민주주의가 비로소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92)
  • 정당을 통해 갈등의 수를 줄이되 갈등의 규모는 사회화 해서, 가장 바람직한 공익이 뭔지를 정당들이 서로 대표하게 하고, 그렇게 형성된 두 개 내지 세 개 정도의 대안이 선거에서 경합하게 하는 것, 그것이 좋은 민주주의의 조건이라는 말이다.(104)
  • 문제는 깨어나지 못한 시민이 아니라 이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정치 세력에 있다는 생각의 전환은 왜 어려운 것일까. 그런 전환을 억압하면서 시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알리바이 담론은 언제쯤 사라지게 될까.(110)
  • 민주주의는 큰 변화를 잘 허용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매우 강고한 제도적 정당화의 원리를 갖는다.(117)
  • 민주주의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잠재된 갈등들에 대해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관리하기 때문이다.(121)
  •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진보정치가 겪은 진통이 우리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서유럽 좌파가 1백 년 전에 경험한 것을 지금 우리가 형태만 달리 해서 반복하고 있다.(129)
  •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몰라도 일단 민주정치에 참여하겠다고 하면 진보의 이론은 정치적 실천의 적극성을 가능케 해야 하고, 연합을 하는 것도 적극적 실천을 위한 선택이어야 하지 그 자체로 끝나면 안 된다.(137)
  • 진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보수만이 아니다. 오히려 반민주적 좌파 내지 혁명적 좌파와의 싸움이 더 힘들고,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민주주의하에서 진보는 성장, 집권하기 어렵다.(141)
  • 우리 사회처럼 도덕성이 강조되는 정치도 없지만 한국 정치가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은, 한국의 정치가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성을 따지는 동안 실제 개선해야 할 정치의 현실을 놓쳐 버리고 결과적으로 부도덕한 정치 현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143)
  • 이념이 정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이념을 만든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148)
  • 통치의 정치학을 진보가 발전시키지 않은 채, 저항의 정치학만 고수한다면 끊임없이 제기될 이슈들과 요구들 사이에서 분열만 게속하게 될 것이다.(169)
  • 인간적 삶을 풍부하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진보적이어야 하고, 민주주의의 정치적 내용이 가난한 서민들에게도 공정하게 실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진보적이어야 하지, 거꾸로 진보적인 것에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종속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172)
  • 진보의 열정이 정치적 이성과 만나고 그것이 좀 더 넓고 풍부한 인간적인 기초 위에서 성장해 갈 때 진보 정치는 매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174)
  • 투표 불참자의 수는 결국 그들이 "기대하는 대안이 억압된 크기"를 말해 준다고 보았다.(203)
  • 박근혜는 이명박보다 못하고, 더 위험할 수 있다.(208)
정치의 발견/박상훈/폴리테이아 20110124 216쪽 11000원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있는 저자가 정치가 심상정 씨가 원장으로 있는 '정치바로 아카데미'에서 2010년 11월부터 5회에 걸쳐 이루어진 강의를 엮은 책이다. '진보파에게 말 걸기'라는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상황과 비교하며 읽으면 따끔한 충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보수뿐만 아니라 반민주적 좌파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집권하기 어렵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 진보는 왜 그 모양이냐는 지적에 대한 답도 알려 준다. 우리나라가 얻은 민주주의가 속성이었다면 진보 좌파는 서유럽 좌파가 1백 년 전에 경험한 것을 방금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것에 인간적인 가치를 종속시키며 분열과 실패의 책임을 시민에게 전가하는 알리바이 담론(변명)을 거두고 진보 정치의 매력을 키우라며 일침을 가한다.

투표 불참자의 수가 그들이 기대하는 대안이 억압된 크기라고 한다면 1987년 민주화 이후 계속 떨어지는 투표율은 보수 양당제를 대체할 진보 정치를 갈망하는 것은 아닐까? 진보 정치가 선택의 대안이 되려는 성장과 변화의 노력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현실체제를 쉽게 인정하고 있지 않느냐는 반문에 가치를 앞세워 스스로 고립화되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우리가 한 2년쯤 지나 다시 만나서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지금보다 더 지혜롭고 행복한 삶을 말하게 될 것인가?" 책의 말미에 던지는 질문이다. 아마도 대선을 염두에 두면서 한 말이 아닐까 맘대로 추측해 본다. "박근혜는 이명박보다 더 못하고,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화되는 것 같아 두렵고 답답하다.

2012-06-11

강수진의 발과 말

십대 때는 좋아서 했고, 이십대 때는 무조건 열심히 했고, 삼십대 때는 내가 뭘 하는지 알고 춤을 추었다. 사십대가 된 지금은 비로소 무대 위에서 즐길 수 있게 됐다. 은퇴, 언젠가는 하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20120609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발레리나 강수진의 말)

예전에 사진으로 접한 강수진의 발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백조의 호수처럼 우아한 발레리나가 그리도 흉측한 발일 줄 몰랐습니다. 그 놀라움은 어떻게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됐는지를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선천적 조건에 약간의 운이 따르면 누구나 그렇게 됐을 거라는 시기 섞인 꼴통적 선입관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런 발만큼 의미 있는 말을 들려줍니다. 사십대가 된 지금은 즐기며 발레를 하고 있고, 오늘 열심히 살고 열심히 연습하면 내일 좋은 결과가 나오게 돼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은퇴를 하겠지만 오늘이나 내일은 아니랍니다.

삼년 배운 걸 삼십년 동안 열 번 써먹으려는 얄팍한 전문가 놈상을 작심삼일이라도 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