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5

실제와 허구 사이에서 가치의 흔적을 붙잡다

주제넘게도 문학과지성사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출간 기념 이벤트에 응모했습니다. '사서 보든, 빌려 보든, 베껴 보든, 빼앗아 보든, 훔쳐 보든 놓치지 마라!'는 역자 장경렬 교수의 말과 '역사적인 책을 받아보실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문지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트위터 영향인지 요즘 140쪽이 넘는 책을 읽으려면 엄청 부담되는데 모터사이클에 관한 정비지침서로 오해를 살만한 소설은 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어서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책을 펼치면 지은이 소개와 서문이나 작가 후기를 먼저 훑어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스패너가 그려진 표지를 넘기며 지은이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Robert Maynard Pirsig) 소개를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정신병력이 있는 피어시그는 1968년 7월 아들 크리스와 함께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났고, 이 여행의 기록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기본 골격을 이루게 되었답니다. 책 뒷부분에 작가를 자세하게 소개한 내용 가운데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기록도 볼 수 있습니다. 1946년에 군에 입대하여 1948년까지 2년 동안 한국에 있었으며, 이때 경험은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소설은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하여 기록된 것'이지만, '엄밀한 사실적 기록은 아니'라는 말을 작가의 노트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들 크리스와 떠난 여행에 관한 자전적 소설이지만 스스로 '야외 강연'이라고 부른 과거로의 여행은 '꿈을 꾼 사람'이 '파이드로스'(58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 '나'는 지은이 피어시그인지 '그 사람 자신이 유령이 되어버'(79)린 파이드로스인지 모호하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경치를 바라보는 수동적인 상태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완전히 경치 속에 함몰'(25)되어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휴가를 가는 기분으로 주인공 '나'를 따라가면 되니까요.

유령을 쫓는 파이드로스

모터사이클 대장정은 두 가지 골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인공 '나'와 아들 크리스, '연장을 끓어내고 그런 귀찮은 일'(38)을 하지 않는 이웃집 부부 존과 실비아와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는 여행과 파이드로스의 세계를 탐구하며 철학적 사유를 들려주는 '야외 강연'으로 시작합니다.

유령을 만난 적이 있느냐는 크리스의 물음에 '한때 알고 지내던 사람 가운데는 유령 하나를 찾아 헤매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일생을 보낸 사람'(79)인 파이드로스를 알려주지만 정작 '나'는 '유령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81)고 합니다. 파이드로스는 '이성이라는 유령을 찾아 헤'(638)매는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죠. '모든 공학 기술, 모든 현대 과학, 모든 서양 사상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그런 유령'은 '스스로 자신을 합리성이라고 부르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온통 모순과 무의미뿐'(155)인 유령을 의심하며 파이드로스는 지적 사유를 시작합니다.

파이드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설교에 희미하게나마 위선의 냄새를 감지'(685)하고 '자기 자신과 대립되는 분열된 정신'(715)때문에 정신 병원에 수용되어 전기 충격 치료까지 받게 됩니다. '동양적인 것이든 서양적인 것이든...만물을 생성해내는 거대하고 근원적인 힘인 도'(450)와 '질이 곧 부처이고...질이 곧 예술의 목적이라는 개념'(490)까지 이르며 질에 대한 이해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리하여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음을 완벽하게 인식하는'(258) 깨우침의 경지에 이릅니다. 결국 이성이라는 유령을 찾아 '그 유령을 파멸시키기를 원했는데, 그 유령이 바로 과거의 그 자신'(162)이었음을 깨닫고 멍에에서 해방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개성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대개 나쁜 쪽으로 변한다. 하지만 어쩌다 놀랍게도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모터사이클 관리에서 실제로 관리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개성'(92)이고 '내 주변 사실들의 질에서 부처를 찾는'(654) '당신의 인격에 반응하는'(559) 모터사이클은 '모든 것이 나름의 목적'이 있어 '질의 결정체인 셈'(533)일지도 모릅니다. 아울러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리는 동안 '나'와 마찬가지로 정신병 초기 증세라는 진단을 받은 아들 크리스가 또 하나의 파이드로스라는 발견을 하게 됩니다.

성벽에서 찾은 가치의 흔적

'화학 분야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뛰어난 재능'(749)이 있었던 파이드로스는 군대에 들어가 한국으로 오는 '배의 뱃머리에서 보았던 성벽의 영상'(220) 때문에 가치의 본질인 질을 찾는 지적 방황을 시작합니다. 이후 철학으로 학위를 받고, 인도로 건너가 동양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성벽에 대한 첫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는가 하면 '한국의 성벽과 같이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비지적인 현실을 보기 시작하면, 그 모든 언어적인 것들은 몽땅 잊고 싶어질 것'(439)이라며 그것이 바로 질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성벽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 성벽을 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 초월의 상태에서 그 일을 제대로 하도록 자신들을 유도하는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그들 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일을 그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총체적인 핵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516)며 어떤 질도 소유하지 않는 현대 기술 공학에 대한 뼈아픈 충고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낭만적 속임수라는 꿀을 발라 위장해놓은 기술 공학적 추함, 바로 그것에 당신은 열광하'(519)고 있다는 경고를 합니다.

파이드로스가 질을 찾아 떠나며 마주치는 동서고금의 철학은 '문화를 옮겨 나르는'(738) 여정이었습니다. '도대체 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332)라며 그토록 찾던 질은 어쩌면 한국의 성벽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평화는 올바른 가치를 낳고, 올바른 가치는 올바른 생각을 낳는다. 올바른 생각은 올바른 행동을 낳고, 올바른 행동은 고요함이 물질적으로 현현(顯現)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그런 작업-즉, 누가 보더라도 확연히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의 중심부에 고요함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작업-을 낳는다. 그것이 바로 한국에서 본 성벽이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526)

파이드로스는 한국의 성벽을 아주 천천히 돌아보며 '무아(無我)의 경지'(523)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가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나'와 크리스는 모터사이클 여행을 하면서 대화가 별로 없습니다. 과거의 나인 파이드로스를 찾는 여정이었기 때문이죠. 여행이 끝날 무렵 크리스가 묻습니다. '우리가 지금 와 있는 곳은 어디예요?' 생각하기도 귀찮다는 듯 대답합니다. '나도 모르겠다'(708)  '두뇌에 전극이 연결되기 이전에 그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유형의 자산을 상실했'(338)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나'는 크리스에게서 파이드로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긴 것이'고 '이제 사정이 더 나아질 것이'(735)라고요. 실제인지 허구인지 모르는 공간에서 부자간의 사랑과 믿음을 확인하며 다시 길을 떠납니다. '물음을... 동일한 물음을 계속 묻는 존재'(718)인 크리스와 함께.

파이드로스의 지적 방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파이드로스는 '나'이거나, 그의 아들 크리스이거나,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성벽에서 찾은 가치를 우리는 '주변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원하지 않'(378)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 보게 합니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것인지 잊고 사는 이에게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무척 길고 지루한 여행이 될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기계공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정비사의 느낌'이라는 말과 현대인의 외로움과 기술 공학(633~638)에 대한 '야외 강연'은 대단히 인상 깊었습니다. 모터사이클을 타거나 산에 오르는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가치의 흔적 한 올을 줍는 행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 모터사이클이 질주하는 속도감은 접어놓고, 고산지대를 오르는 기분으로 아주 느긋하게 걸어야 지치지 않을 겁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로버트 M. 피어시그/장경렬 옮김/문학과지성사 20101029 800쪽 18000원

2010-11-28

로또

너무 이른 일요일 저녁
낙엽 사이 흘린 기억 주워 담다
당신 몰래 로또를 샀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차차 밝혀지겠지만
아무렴 어때요
설레임과 상상이 들끓는
한 주가 될 테니까요
내 인생의 로또
당신처럼

2010-11-24

나를 대신해 앓고 있는 소설가, 김이설

ⓒ문학과지성사
마지막으로 소설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읽긴 읽었는데 내용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백 쪽이 넘는 서양 소설을 읽었던 것도 같고, 매미 소리가 극성을 부릴 때 썩 괜찮은 추리소설을 읽으며 지냈던 것도 같습니다. 책장을 덮는 동시에 모두 휘발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를 않던가, 요즘 자꾸 뭘 잊어먹는 횟수가 늘어나서 그럴지도 모르고요.

여성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편향된 시각이겠지만, 립싱크 같은 소설을 양산하며 여성작가라는 명함을 내미는 이들이 곧잘 눈에 띕니다. 호불호는 개인의 취향이지만 화려한 표지로 서점 진열장을 장식하고 있는 소설을 잠깐이라도 들춰보다 휘발성 소설만도 못할 때가 잦아 이내 내려놓곤 합니다.

지난 오월, 뜻밖의 선물로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받았습니다. 뭐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책장을 펼쳤습니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열세 살」을 비롯해 그동안 발표한 여덟 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을 덮을 때쯤 예리한 면도칼에 베인 상처에 소금이 닿은 것 같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잔인하게 말하고 있었던 거지요. 누구나 해봤음직하거나 목격했음직한 것들이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아 만신창이가 된 주인공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어떤 주인공은 아픔마저 생활이 돼버려 책장을 넘기는 이만 안타깝고 죄스럽게 만들곤 했습니다.

아웃사이더나 하류인생 보다 못 한 더럽고 기구한 밑바닥 '여자'의 삶을 연민은 한 방울도 남지 않게 꼭 짜버리고 덤덤하다 못해 아주 매몰차게 전하는 소설가의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문득,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했다. 비로소 그들에게 미안하다. 그들을 위해 오늘 밤도 깨어 소설을 쓴다."는 김이설을 그렇게 만나게 됐습니다.

김이설이 말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더 호되게 앓는' 여자에 관한 긴 소설 『나쁜 피』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전히 차가웠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나오는 여덟 편의 삶을 적분한 소설이 『나쁜 피』였고, 『나쁜 피』를 미분한 이야기가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자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가족, 행복, 불행, 폭력, 운명, 힘, 고통, 죄스러움과 침묵을 능수능란하게 미분과 적분을 하며 역설적으로 풀어놓습니다. 커다란 목소리로 교훈을 말하거나 이 길로 가야 한다며 잡아끌지도 않습니다.

"소설도 같다. 내가 만든 인물들이 당신을 대신해 앓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부끄러워 죄송하다'고 대표로 말하는 김이설을 만나게 됩니다.

'김이설은 소설 쓰는 사람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습작하면서 남들과 다른 이야기(이설·異說)를 쓰겠다는 생각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요즘 글발이 좋다는 소식을 엿봤습니다. '간만에 문장이 풀려 아침부터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소설가 김이설을 상상합니다. 나를 대신해 앓고 있는 또 다른 주인공들을 만나 부끄러워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 인용문은 모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과 『나쁜 피』 작가의 말입니다.

2010-11-23

대화


고기 많이 잡혀요?
글쎄요. 안 잡히면 그만이죠, 뭐.
갈대가 죄다 쓰러져 있는 걸 보니 비가 많이 내렸었나 봐요?
추석 전에 엄청 내렸어요. 지금 개울은 그때 모습이 아니에요.
물이 참 맑은데 가재는 없나요?
많았는데 여름에 놀러 온 도회지 사람들이 죄다 잡아갔어요. 겨울 되면 다시 나타나요.

2010-11-22

한국은 미국의 종말을 쫓고 있는가

  • 15년 전, 세계는 양극 체제에서 일글 체제로 바뀌었다. (...) 지금은 미국이 무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1985년에도 소련이 무너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25)
  • 소련의 무계급사회에 맞서 미국이 뒤늦게 어설프게 내놓은 것이 중산층사회라는 신화였다. (60)
  • 미국은 세 방향에서 거위를 공격하고 있다. 하나는 지적재산권법 시행을 통해서, 하나는 컴퓨터 보안 분야에서 툭하면 범법자로 몰아가는 작업을 통해서, 마지막 하나는 엉망이 된 나라의 심벌이 되어버린 이른바 소프트웨어라는 사기성이 농후한 영속화를 통해 공격이 이루어진다. (69)
  •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파를 초월해 모든 정치 세력이 교육과 의료 같은 공공부문에서는 폭리를 취하는 일이 없도록, 또 산업에 지나친 규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는다. (101)
  • 미국에서는 가정이 대체로 원자화되었고 여러 주에 흩어져 산다. (...) 어려움이 닥치면 사람은 보통 가족의 도움에 기댄다. 그런데 미국인은 워낙 핵가족으로 살아가다 보니 이런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대부분이다. (134)
  • 소련 경제에서는 돈이 딱히 쓸모가 없다 보니 쳐주지도 않았고 비교적 자유롭게 돈을 나누어 썼다. (...) 한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약간은 가지는 것이 중요했다. (138)
  • 수십 년 동안 마케팅이 해온 일은 결국 새것이 헌것보다 좋다는 인식을 만인에게 심어주면서 수많은 제품의 질이 서서히 저하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도록 만든 것이었다. (145)
  • 소련의 의료 체계는 치료를 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다가 병에 걸리게 만들지는 않았다. (156)
  • 감옥, 병원, 학교 건물이 건축학적으로 비슷비슷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감옥, 병원, 학교는 똑같은 시스템의 상이한 부분일 뿐이다. 시설에 수용되는 인생 역정의 상이한 단계를 나타낼 뿐이다. (164)
  • 바이오연료는 에너지 문제의 해법으로 가끔 거론되지만 결국 농경지에서 식량이 아닌 연료를 기르자는 소리다. (178)
  • 우리는 생활의 질이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점점 낮아지는 현상을 볼 것이다. 언론은 이것을 은폐하고 호도하려고 애쓰지만 이 얄팍한 부정의 베일을 꿰뚫어 보려는 사람은 얼마든지 꿰뚤어볼 수 있다. (179)
  •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은 것에 대해 3장에서 설명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소련 체제의 성격 덕분이었다. 미국이 그런 식의 횡재를 앉아서 누릴 가능성은 없다. (188)
  • 사람들은 정치적 무관심이 마치 심각한 사회악이거나 한 것처럼 개탄하지만 내가 보기로는 무관심할 만하니까 무관심한 것이다. (194)
  • 위기가 닥쳤을 때 옆에서 같이 지내면 가장 안전한 집단은 강한 이념적 신념을 공유하지도 않고 논쟁에 쉽게 휩쓸리지도 않고 배타적 정체성이 과잉되게 발달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199)
  • 붕괴가 일어난 다음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자질은 어쩌면 한 발 물러서서 장미 향기를 맡을 줄 아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219)
  • 편의품과 필수품의 이분법을 완전히 뒤집으면 공기, 물, 식량, 이 세가지 말고도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딱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편이다. (221)
예고된 붕괴/드미트리 오를로프/이희재 옮김/궁리 20100414 286쪽 13000원

1962년 쏘련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7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에서 사는 저자가 쏘련의 붕괴를 직접 목격하고 들려주는 미국과 쏘련에 대한 이야기. 쏘련이 망할 줄 몰랐듯이 미국이 망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지금, 경제 폭풍이라는 엄청난 변화에 질겁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미국은 소련의 종말을 쫓고 있는가'라는 부제가 책장을 넘길수록 "어라, 우리 얘기네!"하며 한국은 열심히 미국의 종말을 쫓고 있다는 확신을 들게 한다.

2010-11-18

문제는 스펙이 아니라 실수야

1.
신입사원 시절. 보수용으로 쓸 배관 자재를 주문하였습니다. 며칠 지나 자재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에 나가보니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죠. 트럭 한가득 배관재가 실려 있더군요. 어라, 내가 주문한 게 아닌데 하며 납품증을 확인해보니 천인공노할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애당초 작업에 쓸 배관은 60미터가 필요했습니다. 주문한 배관은 360미터가 도착했던 겁니다. 보통 배관재는 1본이 6미터입니다. 60미터가 필요하면 10본으로 주문을 넣어야 하는데 단위를 확인하지 않고 60으로 써넣었던 거지요. 더군다나 스뎅이라고 불리는 sus 계열이었으니 일반 배관재보다 그 값이 서너 곱절은 됐으니까요.

순간 눈앞이 막막했지만 어쩝니까. 대굴빡을 급하게 굴렸죠. 현장 작업반장에게 6본만 남기고 나머지는 공장 외곽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순탄하게 작업은 마무리됐지만 짱박은 자재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후속작업에 그 배관이 필요하게 되어 보스에게 이실직고했습니다. 여차여차해서 자재가 있으니 그걸 쓰겠다고요. 보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하라며 넘어갔습니다. 그제야 놀란 가슴이 진정이 되었답니다.

그 후로 저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맞습니다. 단위(specification)가 무엇인지 두세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교정작업을 하는 편집자 눈에 맞춤법이 젤 먼저 띄는 것처럼 말이죠. 신입사원 시절에 저지른 실수가 어디 이것뿐이겠어요. 온갖 실수를 저지르는 기간이 신입사원 시절이고,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어지간하면 다 용서가 되는 시절이 바로 그 시절입니다.

그렇게 삼 년 동안 좌충우돌 했던 경험을 열 번 정도 써먹다 보면 삼십 년이 흐르고 은퇴를 하지요. 물론 똑같이 써먹으면 은퇴 시기가 빨라지니까 실수도 줄이고, 튜닝도 하고, 가끔은 새로운 걸 선보여야 하겠죠.

2.
오늘이 수능시험 날이죠. 고생은 했지만, 어디 수험생 혼자만 고생을 했겠어요. 같이 시험 본 동기들도 똑같이 고생했고, 간식 챙겨주신 어머니들도 고생하셨죠.

요즘은 열에 여덟이 대학을 진학한다고 하데요. 소위 말하는 일류대도 있을 것이고, 생전 처음 듣는 대학도 있는 걸 봐서는 솔직히 학력 인플레이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만 접겠습니다. 다만, 오늘 시험을 보신 분들은 대학에 진학해서 스펙 쌓는데 열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막걸리 집에 모여 개똥철학을 얘기하고, 꼰대 같은 기성세대를 맘껏 욕하시기 바랍니다.

대학은 다음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 성취했어도 성공한 대학생활입니다. 학점(Spec), 사랑(Love), 동아리(Circle). 스펙은 그 셋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랑과 동아리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걸 느낄 때가 올 겁니다.

대학생활은 이제 인생의 신입사원이 됐다는 발령장입니다. 실수를 많이 하세요. 스펙이 아니라 실수와 경험을 통해 더 많은 걸 배운답니다. 경험의 황금시기이자 실수의 면피시대가 대학 입학식날부터 첫 월급 받기 직전까지니까요.

이상은 인생의 신입사원 시절을 어영부영 보낸 사람의 지청구였습니다.

2010-11-16

고객 변천사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를 경영이념으로 내세운 아무개 회사는 고객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했습니다. 순식간에 변하는 물리적 처방이 아니라 은근히 근본을 변하게 하는 화학적 처방을 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지요. 지금까지도 결재 칸 최상위를 고객이 자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90년대 초반에는 엄연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고객이란 내 일의 결과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때 배워서 아직도 기억하고 실천하려는 고객에 대한 정의입니다. 처음 접했을 때는 단순히 후공정에 있는 사람이나 업무를 고객으로 인식하고 있었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조금 더 살을 붙였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회사에서 제일 끗발 있는 부서는 금고 열쇠를 쥐고 있는 관리팀이나 경리과 일 겁니다. 세금계산서 하나 처리해 주는 데 말단이 가면 안 된다고 하면서, 높은 분이 전화하면 굽실거리며 하는 경우가 있죠. 고객에 대한 정의로 잣대를 대면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가 아니라 고객을 죽이는 가치창조에 가까울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 더 배웠습니다. 끗발 좋은 계급장을 달고 있다고 사람까지 끗발이 좋은 거 아니라는 걸요. 한마디로 말하면 영원한 갑은 없다는 거죠. 이 사실을 늦게 깨우칠수록 고객들은 울화통이 터지며 살게 됩니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딱 한 권만 추천하라면 저는 주저 없이 『좋은 회사 존경받는 기업인』을 꼽습니다. 회사를 창업하려는 분이라면 썩 괜찮은 초심을 갖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좋은 구절들이 많은데 저는 이 구절을 대하는 순간, 바로 이것이 고객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왜 회사 일이 헌신적일 수 있는가는 바로 회사일이 자신이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을 할 수 있게끔 해 주었기 때문이다.

리노 식품(RHINO FOODS)을 소개하면서 나온 구절입니다. 저는 회사라는 말 대신에 고객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고객은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게 해준다.

표절했지만 고객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사람이나 업무에 한정돼 있던 개념에서 존재 이유로 확장이 된 셈이죠. 내 일의 결과를 사용하는 사람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게 해준다는 정도 되겠죠. 그렇다고 제가 고객 전도사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고객을 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고객에 대한 정의가 바탕에 흐르고 있고, 그래서 더욱 분발하라는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새로 생긴 고객에 대한 관심사는 애플입니다. 아이폰 열풍과 달리 서비스는 아주 형편없는 낙제점인데도 왜 그렇게 열광하고 있을까 하는 겁니다. 공짜로 주는 범퍼를 받으려면 서비스 센터를 두 번이나 방문해야 합니다. 국내 기업체가 그랬다면 승용차로 들이받는 돌진남이 서너 명은 나왔을 텐데 말이죠. 아이폰을 쓰는 고객들은 욕은 하지만 군소리 없이 발걸음을 팔고 있는 게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런 고객을 충성고객 혹은 애플빠로 부르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뭔가 새로운 고객이 출현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새 스토리 얘기를 많이 하죠. 스토리가 없으면 말짱 꽝인 시대죠. 남이섬을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이유가 겨울연가라는 스토리가 있는 것처럼요.

아이폰과 맥북에어에 열광하고, 잡스가 뭘 발표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슈가 되고 있죠.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긴 줄을 서는 생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고객을 딱 한마디로 부를 만한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더 명쾌하고 핵심을 집어 줄 마땅한 이름이 생길 때까지는 당분간 스토리와 문화를 먹는 고객이라고 부르렵니다. 저도 스토리와 문화를 먹기 시작했거든요.

삼천포로 빠지는 얘기지만 사족을 하나 붙인다면 정치인은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해주는 세상이 어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먼저 상호 고객이 되어야겠죠.

2010-11-11

호수와 나무 - 오규원


─ 서시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오규원/문학과지성사 2005

높이와 깊이로 서는 나무.
담고 싶다.
닮고 싶다.

2010-10-27

책에 관한 두 가지 사실

하나.
책에는 정답이 없다. 책은 절대로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정답이 적힌 책이 세상에 나왔다면 그 뒤로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 다시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
책만큼 정정당당한 세계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은이가 부도덕하지 않은 이상 같은 책이 같은 시기에 두 군데 이상의 출판사에서 출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책을 쓰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뒤집으면 옆 출판사에서 잘 팔린다고 똑같은 책을 냉큼 유통하는 출판사는 없다는 말이다.

사족.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다. 그런 가을이 사라졌다. 지난봄에 이어 가을마저 개혁적 중도보수 계절이 된 것일까? 미처 노랗게 물들지 못한 은행잎이 타이르듯 떨어지며 속삭인다.
- 책에 정답은 없지만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답니다. 책 잡힐 일 하지 마시고 책이나 읽으세요.

2010-10-26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이정록/문학동네 1994

마을 가까이에 있는 나무도 흠집이 있는데
마을에 사는 나는 이토록 성하게 있습니다.
소시민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바람 부는 대로
어영부영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상처가 나도 부러지지 않는 나무를 한 그루 심으렵니다.

2010-10-25

아이폰으로 투자할까?

트위터에는 각양각색의 이벤트를 알리는 글이 많이 올라오지만 대부분 생깝니다. 그런 와중에도 신간을 알리거나 책을 주는 이벤트는 욕심이 살짝 나곤 합니다.

지난 8일 출판사 한빛비즈에서 신간 《아이폰으로 투자하라》를 RT 하면 다섯 명에게 책을 준다는 이벤트가 올라왔더군요. 마침 트위터에 접속했을 때 바로 보고서는 아이폰도 달라는 멘트를 달고 RT를 했습니다. 당첨되길 기대하는 마음이 영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새로 나온 책을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진심입니다.ㅎㅎㅎ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당첨됐다는 멘션을 봤습니다. 덕분에 즐겁게 한 주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주소를 보내고 14일에 택배를 받았습니다. 땡잡은 기분이 이럴 겁니다. 오월에도 피박인생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번에도 책을 받았으니 이제 면피는 한 인생인가 봐요. 오월에 여동생 같은 문지를 알게 됐다면 시월에는 건실한 청년 느낌을 풍기는 한빛비즈(@hanbitbiz)를 만났습니다.

책은 아이폰으로 접할 수 있는 앱을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제와 관련된 다양한 어플리케이션과 RSS나 메일을 이용하여 정보를 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그림으로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더군요. 아이폰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유용할 듯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폰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폰이 출시되면 액세서리 시장까지 떠들썩하니 말이에요. 이렇게 책으로도 나오고요. 엄청 팔렸다는 갤XXS에 관한 책이 없는 걸 봐서는 애플교 교주 잡스가 인물은 인물인가 봅니다.

그럼 《아이폰으로 투자하라》는 아이폰이 없는 분들에게는 무용지물일까요? 아닙니다. 이 책을 보고 아이폰을 사는 분도 있을지 모르니까 결코 무용지물은 아닙니다. 오히려 잡스 교주가 고마워해야 할 책이 아닐까 합니다. 이참에 아이폰으로 투자해서 《아이폰으로 투자해서 대박 나는 101가지 방법》이나 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돈과는 인연이 없는지라 쓸데없는 생각은 접었답니다.

2010-10-24

두 회사 이야기

1.
지금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두 그룹의 계열사에 다닐 때 얘기다.

이십여 년 전에 입사한 L이라는 회사. 어느 날 그룹 회장이 내려와 사내 식당에서 강연할 예정이었다. 그룹 오야붕이 온다는 데 길가에 뼁끼칠이라도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이 한마디에 쏙 들어갔다.
- 회장이 공장으로 출퇴근한 것도 아닌데 뼁끼칠한다고 달라진 모습을 알 리가 없잖아.

L을 퇴사하고 S라는 회사에 들어갔을 때도 회장이 내려온다고 했다. 공장 준공식 이후 처음이라며 투워 코스 티에프티까지 만들며 생난리를 쳤다. 조금 뻥을 섞는다면 길가에 모래알까지 다 주웠다. 그렇게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삐까번쩍하게 단장을 했지만 회장은 내려오지 않았다. 아이엠에프로 빅딜설만 연일 나오던 시절이었다.

2.
다음 달 11일부터 1박2일간 열리는 쥐20 때문에 서울 아무개 구청은 동원한 사람으로 물청소를 한단다. 돈 좀 있는 나라-도덕적인 나라가 아니라-가 돌아가며 밥이나 처먹는 모임을 두고 돋보기를 들고 티끌까지 줍는 기세다. 이 한마디만 묻자.
- 오바마가 그 거리를 걸어봤냐?

하나 더. 쥐20 정상회의라는데 비정상인이 참석해도 되는지 참말로 궁금하다.

S사 그룹 회장이 한마디 하면 너나 잘하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쥐20과 국격을 얘기하는 오야붕도 피차일반이다. 어쩜 이리 쏙 빼닮았을꼬. 11월 11일. 날짜가 참 좋다. 기념으로 담배나 끊어야겠다.

2010-10-11

한국, 한국인 비판 & 전 세계가 다 아는 비하인드스토리

한국, 한국인 비판
전 세계가 다 아는 비하인드 스토리
이케하라 마모루
중앙m&b 199901 252쪽 7000원
이항규
모색 199807 269쪽 6500원
외국인의 시각에서 쓴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책은 많지 않다. 그것은 우리 흉을 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편협한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 내 흉을 보면 참지를 못하고 끝내는 싸움으로 번지곤 한다. 하지만 이케하라가 말한 것처럼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이 책은 우리의 부끄러운 치부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한국인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각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을 거침없이 퍼붓고 있다.

전 세계가 다 아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한국인만 모르는 부끄러운 한국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우리만 모르고 있는 치부를 독일 생활을 하며 느낀 사실과 함께 노골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독일과 한국을 비교하면 우리의 현실은 한없이 슬플 뿐이다.

세기의 마지막이라고, 아임에프는 끝났다고, 이제는 새 천년의 시대라고 온 나라가 시끌벅쩍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아니 잊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이 있었나조차도 모르는 동물적 감각을 지녔나 보다.

슬픈 현실 앞에서 침묵하는 다수보다 행동하는 소수가 될 때다.

2010-09-26

기차바위 타고 만난 저자 사인회

추석 다음날 수락산에 올랐습니다. 산에 사시는 분들은 등산이라고 하면 너무 건방지다는 말씀을 하시는지라 그분들 뜻을 따라 입산을 했습니다. 수락산역을 들머리로 해서는 몇 번 가봤던지라 다른 코스가 없을까 궁리를 하다 회룡역 동막골을 기점으로 하는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회룡역에 내려 동막골이 시작하는 동암중학교를 물어물어 찾아가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중간에 김밥이랑 연양갱을 사기도 했죠. 회룡역에서 걸어가면 이삼십 분이면 갈 거린데 말이죠. 처음 오는 이들이 초입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등산객은 그리 많지가 않았습니다. 깔딱고개로 오르는 길은 붐벼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동막골 코스는 정상까지 가는데 그리 붐비지가 않아 좋았습니다.

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기차바위라는 게 있더군요. 동막골 코스를 선택한 이유가 기차바위를 타보고 싶어서였기도 하고요. 가운데 홈이 파여 있어 홈통바위로도 불리고요. 경사가 급해 줄을 잡고 십여 미터를 올라야 하는데 삼분의 이쯤 올라오니 힘이 달리더군요. 그래도 뭐 도리가 있나요. 물릴 수도 없는 지경이니 오를 수밖에요. 오르고 나서 생각하니 밧줄을 손목힘으로 붙잡고 오르려고 해서 힘이 들었나 봅니다. 한참을 주위 경치를 구경하며 지켜보니 거의 밧줄을 잡지 않고 오르는 이들도 있더군요. 저절로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했습니다.

정상은 사람들로 붐비더군요. 아이스께끼를 사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조금 더 가면 막걸리 파는 곳이 있는지라 유혹을 뒤로하고 앞으로 갔습니다. 철모바위에 다다라 막걸리를 한 사발을 마시려고 했습니다. 한 통에 사천원을 주고 샀습니다. 혼자 마시기에는 조금 많은지라 홀로 올라오신 분이랑 갈라 마시기로 했습니다. 서로 마주 앉아 살얼음이 살짝 뜬 막걸리에 김밥을 안주 삼아 한잔했습니다. 맛이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생판 모르는 분과 거리낌 없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막걸리를 마시게 만드는 산이 주는 매력에 흠뻑 취했습니다.

시원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니 그제야 서늘한 기운을 느끼겠더군요. 막걸리가 너무 얼었었는지 바닥에 얼음이 남아 녹여 달랬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냥 막걸리 한 잔을 서비스로 주더군요. 감사합니다, 철모바위 막걸리집 사장님.

철모바위에서 조금 내려오다가 저자 사인회를 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등산에 관한 책을 펴낸 홍순섭 선생이더군요. 책을 이리저리 펼쳐보다 『실전 명산 순례 700코스』를 집어 드니 직접 사인을 해 주시더군요. 山은 人生의 정원...이라는 글과 함께. 후에 검색해 보니 산에 관해서 아주 유명한 분이시더군요. 산 박사로 불리고 계시네요. 어느 쪽으로 내려가느냐는 물음에 동막골에서 출발해서 노들역 쪽으로 갈 예정이라고 하니 동막골에서 올라왔으면 동막골로 내려가라고 하더군요. 동막골이 또 있느냐며 놀라는 내게 상계동 계곡도 동막골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동막골에서 시작해서 동막골로 내려와야 수락산을 종주한 거라는 말씀을 덧붙이면서요. 다음에는 from 동막골 to 동막골 코스로 수락산에 올라야겠습니다. 그때 다시 만난다면 같이 사진이라도 한방 찍어야겠습니다.

하산하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걷기가 참 편하더군요. 그렇게 헐렁대며 내려오길 반 시간 정도 지났을까요, 헬기가 나는 요란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정상 부근에서 등산객이 추락했는지 구조활동을 하고 있더군요. 모쪼록 무사하길 기원합니다.

걷기가 편해서 그런지 많은 분이 꼬맹이나 애완견을 동반하고 오르고 있데요. 사람 왕래가 잦아서 그런지 막걸리 파는 집이 대여섯 군데는 있더군요. 막걸리집이 그렇게 많은 건 처음 봤습니다. 노들역에 내려가기 전에 그늘에 앉아 구름과자를 하나 물었습니다. 얼려 간 물병 하나는 여전히 녹지 않은 채 있더군요. 뙤약볕이 엊그제 같은데 가을은 이미 산에서 시작하였나 봅니다.

2010-09-17

한통속

1.
옆 동네 나지막한 동산에 약수터가 있습니다. 약수터에 있는 약수는 두 군데서 나오게 돼 있더군요. 먼저 맨 아래 달린 수도꼭지에서 나오는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지요. 다른 하나는 맨 위에서 바닥까지 길게 이어진 관에서도 나오는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칠 때나 구경을 할 수 있죠.

신기한 것은 물이 많이 고여 두 군데서 물이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수도꼭지에서만 물을 받아 가더군요.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약수나 관을 통해 흘러넘치는 물이나 다 같은 한통속에서 나오는데 말이죠.

2.
총리 후보자를 발표하면서 이런 말을 했더군요. 군대를 안 간 게 아니라 갈 수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라고요. 그러면서 모의 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했다네요. 신기한 건 입대 전에 받은 신체검사에서는 시력차가 많이 났는데 법관 임용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네요.

국회 청문회를 통과해서 총리에 취임하면 어엿한 삼총사가 탄생하겠네요. 가카께서도 총을 쏠 줄 모르고, 여당 대표는 글을 모르는 모친 덕분에 군대를 안 갔으니 말이죠. 모두 한통속이 됐네요. 아니면 원래 한통속이었는지도 모르고요. 억수로 공정한 사회입니다.

2010-09-15

서시 - 류시화

- 어느 인도 시인의 시를 다시 씀

누가 나에게
옷 한 벌을 빌려 주었는데
나는 그 옷을
평생동안 잘 입었다
때로는 비를 맞고
햇빛에 색이 바래고
바람에 어깨가 남루해졌다
때로는 눈물에 소매가 얼룩지고
웃음에 흰 옷깃이 나부끼고
즐거운 놀이를 하느라
단추가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그 옷을 잘 입고
이제 주인에게 돌려준다

지 나오는 모습도 기억을 못 하고
날 때부터 옷을 껴입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은
갈 때도 겹겹이 옷을 입고 바리바리 싸서 떠나려고 한다.

2010-09-10

불가능한 꿈은 없다 & 딸 그리고 함께 오르는 산

불가능한 꿈은 없다
딸 그리고 함께 오르는 산
딕 배스, 프랭크 웰스
중앙m&b 199811 408쪽 9000원
제프리 노먼
청미래 200105 318쪽 9000원
대륙의 최고봉을 오르는 주인공들은 전문 산악인이 아니다. 속된 말로 성공했다는 주인공들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50줄에 산에 오른다. 또 한 주인공은 열다섯 살의 큰딸과 산에 오르기도 한다.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로서 그 꿈에 도전하는 것은 큰 용기와 함께 가족들의 깊은 이해와 사랑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이들이 목숨까지 잃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꿈과 용기, 인생의 전환점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확인하고 싶은 도전이기 때문이다.

문득 내 인생에서 무엇인가 빠뜨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많은 이들은 가슴을 치고 있지만 그들은 산 정상에 있었다.

꿈. 그것은 용기 있는 자에게 주어지고 용기는 도전하는 자에게만 있다.

2010-08-26

장외인간

#1
모국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자녀들한테 외국어를 가르치지 못해 환장을 하는 엄마들. 착하게 살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초등학교 때부터 정설로 받아들이는 아이들. 퇴폐업소 비밀 아지트에서 영계라는 이름으로 발견되는 여중생들. 유흥비를 벌기 위해 친구들과 자해공갈단을 결성해서 승용차로 뛰어드는 고교생들. 가정형편이 어렵지도 않은데 명품 중독 때문에 상습적으로 몸을 파는 여대생들. 출세만 보장된다면 애인쯤은 얼마든지 배반할 수 있는 삼십대들. 내가 살아 남을 수만 있다면 남이 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사십대들. 탐욕은 날이 갈수록 늘어 나는데 덕망은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오십대들. (1권 180쪽)

#2
자살이라는 단어를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2권 39쪽)

#3
영어로 개는 DOG라고 표기한다. 거꾸로 읽으면 신을 나타내는 GOD가 된다.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 무엇이든지 한쪽 방향에서만 보고 판단하면 편견과 아집에 치우치기 쉽다. (2권 181쪽)

장외인간/이외수/해냄 20050822

2010-08-25

2MB 신드롬


흠집 덩어리 장관 후보자는 전과 14범을 동경하고
전과 14범은 그런 후보자를 간택하며 자위를 하는 현상

2010-08-24

가설


원래 종자가 그렇다.

이 정권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가설          
이 가설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2010-08-22

추억 한사발 하시죠

뜨거운 여름, 할머니는 입맛이 없다며 막걸리에 밥을 말아 드시곤 했다. 어린 나이에 그 맛이 어떨까 궁금해서 수저로 떠먹었다. 시금털털한 맛에 이내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그렇게 막걸리를 처음 접했다. 촌스럽게 쓴 대포집 간판이 요즘 편의점만큼이나 널려 있던 시절이었다.

민속주점에서 동동주와 고갈비를 먹으며 대학을 다녔다. 생맥주 한 잔에 거금 500원씩이나 하던 시절인지라 학우들이랑 잔디밭에 둘러앉으면 어김없이 막걸리가 등장하곤 했다. 그렇게 마셨던 막걸리는 다음 날 아침이면 바지에 튄 막걸리 자국만큼 개운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막걸리는 원래 골때리는 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산에 갈 기회가 아니면 좀처럼 찾지를 않게 됐다.

70년대 후반까지 술 소비량의 70%를 유지했던 막걸리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됐다. 막걸리를 속성으로 발효시키려고 '발열제인 카바이트를 비닐봉지에 싸서 술통에 넣어 속성으로 발효시킨 카바이트 막걸리'가 유통되면서 그 인기가 급전직하로 떨어지게 되었다. 골때리는 술이라는 근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막걸리 기행》은 일본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지은이가 2007년 일본에서 먼저 낸 책이다. 그러고 보면 막걸리 열풍은 일본에서 일어나 원조국가로 역수입되지 않았나 싶다. 2005년 가을부터 전국을 돌며 새벽술과 낮술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마시며 쓴 지은이는 놀랍게도 여성이다. 술 욕심에 지나칠지 모르는 소소한 스케치를 오히려 여자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과 흥취를 세심하게 그렸는지 모르겠다.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돌며 만난 막걸리는 하나같이 마음으로 빚는 술이다. 막걸리 한 병에 있는 유산균이 요구르트 100병에 맞먹는 양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이 사실은 주당들에게 막걸리는 보약이라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이승에서 시바스리갈로 마지막 이별주를 마셨던 독재자도 막걸리를 좋아했단다. '1965년에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시키고 밀가루 막걸리를 정착시키려고 한 장본인'인 독재자는 정작 자신은 쌀로만 빚은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우리 현대사의 슬픈 단면으로 빚은 막걸리가 아니었나 싶다.

《막걸리 기행》은 참 불친절한 책이다. 물맛만큼 다양하고 인심처럼 풍성한 막걸리를 찾아다닌 저자는 그 주점이 어딘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어디쯤에서 버스를 타고 어느 방향으로 몇 분 정도 가다 내려 지나가는 동네 사람에게 물어 그 막걸리 집에 갔다는 게 전부다. 이쯤 되면 성질 급한 사람은 지은이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지도 모른다. 막걸리집을 찾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인심도 느끼고 정에 먼저 취해보라는 은근한 권유라는 걸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알 게 됐다. 물론 책 뒷부분에 대포집 주소와 연락처가 있지만 내비게이션 없이 아날로그형으로 떠나는 것이 막걸리와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걸리를 만드는데 물의 영향도 있지만, 맛을 좌우하는 것은 온도, 시간, 마음에 있다고 한다. 마치 배탈 난 손주새끼 배를 손으로 쓰다듬던 할머니의 약손같이. 혹은 너와 나만 아는 한여름 바닷가 추억처럼.

막걸리 기행/정은숙/한국방송출판 20100317 346쪽 13500원

2010-08-12

기준

천하엔 두 개의 큰 기준이 있으니 하나는 시비의 기준이고 하나는 이해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기준에서 네가지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고,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면서 해를 입는 경우이고, 그 다음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는 경우이고, 가장 낮은 등급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해를 입는 경우이다.

- 1816년 [家書]

2010-07-17

욕망이라는 이름이 그리는 우리들의 자화상

지난 6·2지방선거에서 보여준 강남 3구(강남구, 서초구, 송파구)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덕분에 오세훈 후보는 강남시장이라는 오명을 들었고, 강남 3구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한 유권자는 서울 민심을 뒤틀었다는 비아냥이 일어났습니다. 과연 우리는 강남 유권자들의 선택이 잘못됐다며 떳떳하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그들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 모습을 살펴봅시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노원구는 강남 3구도 아닌데 서민이거나 서민과 가까운 노회찬 후보가 낙선하고 귀공자풍의 부자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무노조 삼성을 예로 들며 노동운동의 어려움을 얘기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가정에 삼성 제품이 하나도 없을까요? 용산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며 울분을 삼키는 유가족 가운데 이명박에게 투표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까요?

민주주의 꽃은 투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투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형이상학적이고 현학적인 표현은 접어둡시다.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투표는 돈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행위입니다. 감세와 성장을 외치는 후보와 분배와 복지를 외치는 후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예산을 어디에 먼저 쓸까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도 나타났지만 소위 보수 후보와 진보 후보를 가르는 기준이 무상급식이었습니다. 당선된 보수 후보는 무상급식에 예산을 배정하지 않으려 하고, 진보 후보는 당선되자마자 무상급식 예산을 마련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투표는 우리가 내는 세금을 어디에 먼저 쓰고 나중에 쓸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이제 앞에서 언급한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다시 살펴볼까요. 뉴타운이 건설되면 자기 집값도 오른다는 착시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도 대상인 기업의 제품을 버젓이 팔아주는 자기모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들소떼처럼 앞에서 달리니까 쫓아가다 악어밥이 되는 집단최면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을 학자들은 계급배반이라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행위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계급배반은 우리들의 간사한 욕망에서 기생하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계급배반은 우리들의 현재 모습을 아주 똑같이 그린 자화상입니다. 그렇다면 계급배반을 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강남 3구에서 배우면 됩니다. 욕을 하면 기분이야 풀릴지 모르지만, 우리 모습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강남 유권자는 그들이 원하는 이익을 실현할 가장 적합한 후보에게 아주 정확하게 투표를 했습니다. 강남 유권자는 투표의 속성을 꿰뚫고 있었던 거지요.

유사 이래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겨보려고 어거지로 공짜를 바라는 행위가 바로 계급배반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곳에 내 돈을 쓸 후보에게 투표하십시오.

명심합시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투표는 내 돈을 맡기는 일입니다.

2010-07-10

그곳에 슬픔도 배부른 시인이 산다

함민복이라는 시인을 안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가끔 특정 시인이 쓴 시집을 사곤 하지만 좋은 시들을 엮어 놓은 시집들을 더 선호합니다. 옛날 레코드 가게에서 좋아하는 노래만 골라 테이프에 담아오던 것처럼 말이죠.

십여 년 전, 그렇게 산 시집에서 「긍정적인 밥」이라는 시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미니홈피 대문에 적혀 있었습니다. 함민복이라는 시인은 안빈낙도하는 삶을 사는 줄 알면서 말이죠. 그렇게 이름을 익혔습니다.

시인 함민복이 강화도에 홀로 산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검색을 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선비형 삶을 살아온 줄 알았는데 대단한 오판이었습니다. 치열하게 밑바닥을 전전한 생계형 인생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자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다는 시구가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시인이 시처럼 쓴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는 이런 시인의 삶과 첫사랑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시가 쓰여진 태몽 같은 사연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주책 맞게도 찔끔 눈물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여름에 마니산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능선을 오르며 바다보다 더 넓게 펼쳐진 갯벌을 바라봤습니다. 저곳 어디에 시인 함민복이 살고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화답하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가끔 땀이 송송 맺힐 때 바람이라도 불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강화도에 혼자 사는 시인의 집엔 '빨간 양철지붕으로 된 안채와 파란 양철지붕을 인 행랑채가 있고 흰 슬레이트를 얹은 화장실이 있'답니다. 시인은 이를 각각 '자금성, 청와대, 백악관'이라고 부른답니다. 불쑥 찾아가면 시인이 자금성에 있을지 청와대에서 손짓할지 허리춤을 단도리하며 나오는 백악관에서 마주칠지 궁금해집니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기울이며 뻘에 널린 낙지 구녕으로 떨어지는 석양을 보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싶어집니다. 눈물이 왜 짠지는 그때 물어보렵니다.

눈물은 왜 짠가/함민복/이레 20030305 206쪽 10800원

2010-07-06

이제 왼쪽으로 조금만 가보자

  •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 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18)
  •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는 시험 본 다음에 잊어버린 학생과 시험보기 전에 잊어버린 학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28)
  •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사회진보를 도모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주입한,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72)
  • 민주주의 정치제도 아래에서 20대 80의 양극화 사회가 관철되는 것은 '80'에 속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미래상으로 자신을 일치시켜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는 것도 한몫한다. (117)
  • 사람을 굳이 둘로 나누어야 한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 (128)
  •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삼성 제품을 구매하나요? (148)
  • 국민부담률로 보면 유럽의 우파들은 '좌파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176)
  •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192)
  • 의식은 내게 유리한 것, 옳다고 믿어지는 것에 따르도록 명령하지만, 정서는 내가 '그냥' 이끌리는 것에서 안정과 충만감을 느끼도록 한다. (209)
  •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스스로 바뀌고, 또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더 바뀐다. 세상은 바뀌지 않은 채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만 바뀌는, 이 조화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239)
생각의 좌표/홍세화/한겨레출판 20091124 248쪽 12000원

얼마 전에 독일의 일부 몰지각한(?) 부자들이 필요하지 않은 돈이 너무 많다며 부유세를 도입하자는 뉴스를 봤습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돈 많은 좌파로 몰리며 그 출처를 밝힌다며 세무조사를 득달같이 했겠지요. 《생각의 좌표》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찬찬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무노조 삼성을 예로 들며 노동운동의 어려움을 얘기하자 프랑스 노조 활동가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삼성 제품을 구매하나요? 대답을 못했겠지요.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한나라당에는 투표하지 않았을까요? 하나같이 교육문제를 걱정하면서 정작 자기 자식은 특목고에 보내 일류 대학에 보내려고 합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생각의 지배를 받는 계급배반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책을 읽으며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지 뼈저리게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양보 없는 대결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준으로 보면 유럽의 우파들은 좌파의 좌파가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생각의 영점이 오른쪽 끝에 강제적으로 맞춰졌는지도 모릅니다. 《생각의 좌표》는 이제 왼쪽으로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자는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2010-07-01

개차반 길들이기

1.
개차반 : (개가 먹는 차반, 곧 '똥'이란 뜻으로) 언행이 더럽고 막된 사람을 욕으로 이르는 말

2.
제가 정치인도 아니고요,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굉장한 재력가여서 정치인들과 거래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아닌데 제가 왜 이렇게 분석되고 조사되어야 하는지 정말 소름 끼칠 일 아닙니까?

아무런 원칙도 없이 정치권력에 굽실하는 국무총리실의 고급 공무원들을 저는 정말 고발합니다. 그리고 정치권력에 아부하기 위해서 힘없는 국민의 밥줄까지 불법으로 끊어버리는 그 공권력을 저는 정말 고발합니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 님의 PD수첩 인터뷰 중)

3.
세상에는 개차반 같은 일들을 당하고 나서야 개차반들이 많다는 걸 깨닫습니다. 개차반들은 약해 보이는 상대만 물어뜯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그런 망나니 개차반 위에 쥐새끼 한 마리가 있어 더 기승입니다. 쥐새끼도 찍소리 못하게 잡고, 차반 먹던 개차반들에게 진짜 개차반만 먹게 하여야 합니다.

개차반 주인은 사람이라는 걸 훈련시켜야 합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있다고 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개차반들이 더는 똥을 먹지 않고 사람 맛을 알게 됐으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한테 교육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훈련이라는 말을 쓰는 이치와 같습니다. 미친개와 개차반들은 몽둥이가 약입니다. 이제 개차반 길들이기는 사람답게 살아야 할 내일을 위해 오늘 꼭 해야 하는 우리들의 품앗이가 됐습니다.

2010-06-30

패륜적인 너무나 패륜적인 권력

PD수첩 보셨나요? 쥐코라는 동영상을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고 한 시민을 사찰하고 사회에서 매장했습니다. 삽질의 달인을 오야붕으로 모시고 있는 공직윤리지원관 이인규라는 꼬붕이 한 짓입니다. 무슨 횟집 이름 비스무리한 영포회 조직원이라고 합니다. 욕이 절로 나옵니다. 막장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패륜적인 너무나 패륜적인 권력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시민은 PD수첩이 없었으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저 같으면 화병이 났을 겁니다. 월드컵에 열광했듯 동네방네 광장에서 두루두루 관심 있게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깨 있어야 합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내게도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방아쇠를 당긴 이는 괴로워하는데 방아쇠를 당기라고 한 놈은 버젓이 오페라 구경이나 하고 있습니다. 대머리는 여전히 빛을 내면서 말이죠. 애먼 국민을 야무지게 조지는 오야붕은 파나마 운하에 가서 손뼉 치고 있습니다. 정치보복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단죄가 필요합니다. 패륜적인 권력의 싹을 자르는 것입니다. 혁명, 별거 아닙니다.

2010-06-23

일등이 무의미한 유일한 곳, 사막

  • 국제법상 펭귄에게는 5미터 이내로 다가갈 수 없어서, 5분이 넘도록 펭귄이 지나가길 기다려야만 했다. (28)
  •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세상의 끝, 우슈아이에 함께 가고 싶다고 늘 말했었는데... (45)
  • 몇 등 했는데? 사하라에선 무의미한 질문이다. (59)
  • 사막레이스 참가자들은 코스에 있는 풀도 밟아서는 안 되며, 기이한 바위를 만져서도 안 된다. (68)
  • 선두그룹과 후미그룹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선두그룹은 "이렇게 뜨거운데 어떻게 그렇게 천천히 걸을 수 있어? 빨리 뛰어야 덜 힘들지!"라고 생각한다. 후미그룹은 반대로 "이렇게 뜨거운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뛰어갈 수 있지? 천천히 쉬었다가야 덜 힘들지"라고 주장한다. (88)
  • 사막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어쩌면 만병통치약이다. 완주한 사람만이 그 약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안다. (93)
  • 「연금술사」에 나오는 광장의 솜사탕 장수처럼 조금만 더 돈을 벌어서 여행을 떠나겠다며 광장에서 솜사탕만 팔고 싶지는 않았다. 양치기 산티아고처럼 아끼는 양을 팔아서라도 새로운 길을 떠나는 용기를 갖고 싶었다. (98)
  • 아타카마 사막은 인류가 강수기록을 한 이후로 비가 단 한 번도 온적이 없다는 지역이다. (167)
  • 사막레이스는 무작정 많이 지니는 것이 전혀 현명하지 않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사막레이스에 능력이상 메고 가면 고통이 따른다. (191)
  • 성인, 그것도 중년 남자들이 누구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마음을 풀어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곳, 그곳이 사막이다. (233)
나는 오늘도 사막을 꿈꾼다/김효정/일리 20100228 311쪽 13000원

그녀는 사막 레이스 그랜드 슬레머다. 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그리고 남극까지 1,051킬로미터를 완주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막을 꿈꾸고 있다.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그녀를 유혹하고 있을까? 영화 만드는 일을 하는지라 사막 레이스도 영화처럼 표현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는 주말 산행을 즐기는 의지가 조금 강한 보통 사람이라면 사막 레이스를 버텨낼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렇지만 선뜻 모래바닥을 내딛는다는 건 여간한 배짱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사막 레이스는 일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자신과 싸우며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지 싶다. 사막 레이스를 중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거운 배낭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마치 욕심 많은 인생처럼.

사막에 단 하루도 혼자 있지 못할 놈상이지만 세상의 끝이라는 우슈아이에는 가 보고 싶다.

2010-06-14

삼인오병의 법칙

1.
- 어제 쐬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
- 몇 병이나 처먹었는데?
- 다섯 병.

몇 명이랑 술을 마셨다는 얘기를 쏙 뺀 채 그날 비워진 소주병 개수를 말하며 혼자 다 마신 것처럼 얘기합니다. 대화가 여기서 끝나면 혼자 소주를 다섯 병 마신 걸로 됩니다.

- 몇이서?
- 어, 셋이서.
- 씨방새야. 그럼 두 병도 마시지 않았잖아.

대화가 계속되면 채 두 병도 마시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죠. 처음부터 다섯 병을 셋이서 나눠 마셨다는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은근히 술이 세다는 자랑을 하려고 그런가 봅니다. 하지만 삼인오병의 법칙은 대개가 셋이 마신 걸로 판명이 납니다. 뻥 친 거죠.

2.
가카께서 라디오 방송을 하신답니다. 지방선거가 끝나고는 한 주를 쉬셨죠. 아마도 태극전사들이 승리하지 않았으면 더 쉬었을지도 모르고요.

민심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하시겠죠. 행여나 참이슬을 맞으며 반성을 했고, 다시 처음처럼 굳세게 가시겠다면 어쩌죠. 어쨌든 삼인오병의 법칙처럼 혼자서 소주를 다섯 병 마셨다고 뻥치겠죠.

2010-06-09

트위터 타임라인 예 듣고 이제 보니

트위터 타임라인 예 듣고 이제 보니
멘션 뜬 화면 가득 권력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민심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흐르는 타임라인 멍 때리며 지켜보다
오일장 똥꼬 치마인양 무릎을 탁 치노니
생각이 짧은 사람아 무진장이 여기로다

요즘 뜸한 브리트니 안부마저 궁금할 때
폴로하고 알티하다 디엠하는 그런 사이
사람아 인생이 별건가 우리 그냥 애정하자

트위터를 시작한 지 얼추 일 년이 돼간다. 이게 다 가카 덕분이다. 미국에 가신 가카께서 140자인 트위터를 200자까지 늘이시겠다고 하신 것이 계기가 돼 관심을 두게 됐으니 말이다. 그전까지는 별 관심이 없다가 가카의 한 마디에 흥미가 생겨 계정을 만들었으니 가카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트위터에서 멍 때리며 눈팅을 하다 화개장터에서 똥꼬 치마 입은 처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 하듯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글귀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잘 나가는 신문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슬픈 이야기, 힘없는 이들의 아픈 이야기도 트위터를 하며 알 게 되었다.

옛날 노래가 흐르는 다방에 앉아 농을 거는 편안한 대화가 트위터에 흐른다. 때론 갑론을박하는 토론도 있다. 슬쩍 디엠으로 나누는 귓속말도 있다. 요즘은 브리트니가 나를 폴로 해주지 않아 그 소식이 궁금해지며 기다려지기도 한다.

틀린 생각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만나는 재미가 여간 기쁘지 않다.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었던 생각의 저 너머를 공짜로 줍고 있으니 적어도 대굴빡이 퇴화하는 걸 잠시 늦춘 기분이다. 트위터 하길 잘했다.

2010-05-27

1.
인간에게는 꿈을 꾸는 능력이 있다.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육체적으로 '열등'하게 보인다고 해서 정신적으로 '열등'한 것은 아니다. 육체적으로 '우등'한, 그러나 꿈이 없는 사람보다는 육체적으로 '열등'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이 위대하다. 가슴에는 사랑을, 머리에는 세상을 밝게 해줄 꿈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우주의 주인이다.
- 안문석 교수의 시와 수필 『왜 여기 사냐고 물으시면』 띠앗 2009 88쪽

2.
꿈을 꿀 수 있는 시대가 내게서 멈추는지 아닌지, 우주의 주인으로 살아갈지 주인의 우주에서 살아갈지는 6월 2일에 결정이 되겠지. 그런데 왜 자꾸 슬픈 예감이 드는 것일까...

좋은 글에 딴지 거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슬픈 예감은 빗겨가질 않더라.

2010-05-23

박석에 내리는 비

여름을 사랑한 눈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없는 사랑이라며
모두들 바보라 불렀습니다

시방
온몸 펄떡이며 울고 있습니다
밤새워 진종일 울 기셉니다

여름이 우는지
눈사람이 우는지
끝내 알 수 없어
담배 하나 태워 뭅니다

부엉이 소리 들리는 박석
1번 노래 흥얼거리며
비 맞은 생쥐 한 마리 지나갑니다

2010-05-20

불황

1.
원래 불황이란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황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호황의 반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라톤 경기를 예로 들면 초반에 전력 질주하는 바람에 오버 페이스로 도중에 힘이 다 빠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불상사가 바로 불황이다.
- 나이테 경영, 오래가려면 천천히 가라/츠카코시 히로시/서돌 2010 67쪽

2.
경제적 불황은 주기라도 있다. 바닥을 찍으면 호황으로 접어든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정치적 불황은 바닥의 끝이 어딘지 모르고 그 여파가 몇십 년을 갈지 예측을 할 수 없다. 경제적 불황이 현존하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시간의 늪이라면 정치적 불황은 뒤이어 출현할 인간들에게 물려주는 시간의 부채(負債)다. 경제적 불황은 불상사로 끝나지만, 정치적 불황은 두고두고 채근하는 복리이자로 따라다닌다.

2010-05-18

새삼스레 5·18을 기억하다

1.
내가 다시 태어난 해인 1984년 어느 날.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가려고 고속버스표를 끊고 자리에 올랐다.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내 자리를 찾았다. 묘령의 아가씨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반가운 표정을 숨기며 궁둥이를 슬쩍 붙이고 앉았다. 이럴 땐 첫마디가 중요해. 저... 서울 가시나 봐요. 젠장. 서울 가는 버스에 탔으니 서울까지 가는 게 당연하지. 뻔한 말을 내뱉다니. 그런데 후회할 시간도 없이 귤을 건네주며 그렇다고 한다. 친구들 셋이랑 치악산에 왔다가 가는 길이라며 싱긋 웃는다. 오호라. 서울까지 가는 두 시간 동안 무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버스표를 석 장 끊으니 한 사람은 떨어져 앉아야 하는데 그 옆자리가 내 차지가 된 것이다. 건네주는 귤을 까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그 처자의 고향이 광주라고 했다. 아! 광주.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몰래 훔쳐본 공수부대 군화발과 금남로로 각인된 그 광주라니. 아주 조용히 그날의 광주에 대해 물었다. 잠시 창밖을 쳐다보던 그 처자는 기름기가 쏙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우리 삼촌도 돌아가셨어요.

픽션일지도 모른다며 반신반의했던 금남로에 뿌려진 피가 사실이었다는 걸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버스는 용인을 지나고 있었고, 우리는 말없이 귤만 만지작거렸다.

2.
1990년 1월. 광주에서 유명한 우다방을 거쳐 도청 앞 분수대를 찾았다. 총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했다.

3.
2010년 5월. 버스 요금이 70원이라던 분이 5·18 기념행사가 열린 서울광장에 형형색색의 축하화환을 보냈다고 한다. 5·18 민주묘지에서는 공식적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지 않았다.

2010-05-15

스승의 날

Pestalozzi with the orphans in Stans by Konrad Grob, 1879

1.
그는 길바닥에서 맨발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땅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2.
- 기억에 남는 스승이 있습니까?
- 정말 기억에 남는 스승은 이름이 아니라 행동으로 기억됩니다. 이름이 기억나질 않지만 그 행동은 지금까지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분교에 달랑 두 분이 계셨는데 애들 모두 손등에 때가 시커멓게 껴 있어 일 년에 서너 번은 냇가로 데리고 가 하나하나 때를 벗겨 주셨습니다. 분교 출신이 아니면 모르실 겁니다. 오지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은 무조건 훌륭하십니다. 한 세대가 흘렀지만 여전히 오지에서 고생하시는 선생님은 계시더군요. 아직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동네가 있다면 믿지 못하는 것처럼 여전히 오지에서 고생하시는 선생님은 계십니다. 그분들은 교육환경이니 체계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물지 않은 제자를 인간답게 이끌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3.
오늘은 교사의 날이 아니랍니다.
오늘은 선생의 날도 아니랍니다.
오늘이 교직 공무원의 날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2010-05-14

금요일을 꿈꾸는 이유

1.
김규항은 '이명박만 없으면 살겠다'는 얘기는 위선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뒤집어보면 '이명박 정권 말고는 살아가는 데 별로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권에게 당하기 전부터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게 당해온 사람들의 입장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명박 정권을 욕하는 것과 이명박 정권만 욕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노무현 정부 때도 철거는 있었고, 용역 깡패들은 있었다. 그리고 시위 현장이나 파업과 관련해서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때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하셨던가? 정말 지났을까?
-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김규항, 지승호/알마 20100327 174쪽

2.
오늘은 금요일이다. 주말을 리모컨과 춤을 추거나 1박2일 복불복 캠핑을 꿈꾸는 이에게 금요일은 설레는 날이다. 어쨌든 오늘만 지나면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주말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한 내게 노무현은 금요일까지는 아니었지만 목요일은 됐었다. 목요일이 지나면 금요일도 오고, 곧 주말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 5일이 되면서 금요일에 하던 회식도 자연스레 목요일에 하게 됐다. 그런 목요일이 지나면 금요일에 걸맞은 사람이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런데 나타나자마자 슬금슬금 빠꾸를 하더니 급기야 오늘이 월요일이라고 우긴다. 월요일은 벌써 지났다고 했지만 아니란다. 네가 잘못 알았다며 반성하란다. 그래서 뿔이 난다.

"노무현 추모와 미화에 매몰되어 노무현을 넘어서지 못하는" 현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월요일을 타도하자는 말이 목요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잃어버린 목요일을 다시 찾아야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간을 꿈꿀 수 있기 때문에 누구만 없으면 살겠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고 있다.

2010-05-13

정의와 힘

1.
올바른 자를 따라가는 것은 바른 일이며, 제일 강한 자를 따라가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힘이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힘이 없는 정의는 반항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언제나 악인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를 수반하지 못한 힘은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와 힘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자를 강하게 만들고, 강한 자를 올바르게 만들어야 한다.

정의는 논의(論議)의 대상이 되기 쉽고, 힘은 인정을 받기는 쉽지만, 좀처럼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정의에 힘을 부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힘은 정의에 반항하여, 〈당신은 올바르지 못하다. 나는 올바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올바른 자를 강하게 할 수 없었으므로, 강한 자를 정의로 간주했다. (팡세 298)

2.
이명박 가카는 11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촛불시위 2년이 지났다. 많은 억측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음에도 당시 참여했던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 어느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면서 "반성이 없으면 그 사회의 발전도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고 하십니다.

3.
강한 자를 정의로 간주하는 시대는 지났지만, 강한 자가 정의라고 외치는 시대로 되돌아갈 줄 미처 몰랐다. 강한 자를 올바르게 만드는 것보다 올바른 자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다. 반성하자. 반성이 없으면 그 사회의 발전도 없다지 않는가.

2010-05-11

막걸리와 단일화

지난 주말에 국순당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뭐랄까 달착지근한 맛이 혀에 착 참기는 게 참 수더분하며 착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더군요. 예전에 자고 일어나면 골 때리던 걸쭉한 막걸리가 확실히 변한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술술 넘어가는 목 넘김 덕분에 달게 마셨습니다.

마시다 도수가 어떻게 되나 살펴보다 막걸리를 영어로 표현한 걸 봤습니다. Korean Rice Wine. 막걸리를 영어로 기가 막히게 옮겼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막걸리를 한마디로 압축해 설명하는 번역이라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물론 막걸리를 영어로 직접 옮겨 MacGirly(놈상도 여인들도 사족을 못 쓰는 술?)라고 쓰면 더 좋겠지만 말이죠. 떡을 코리안라이스케이크가 아니라 '떡' 그대로 소개해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막걸리라는 술을 영어식으로 표현하며 와인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이 간단명료하게 그 뜻을 전달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까지 번역한 책을 접하면서 어쩜 이리도 제목을 기막히게 정했을까 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던 책이 하나 있습니다. 『소유의 종말』(민음사, 제러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입니다. 원제가 'The Age of Access'라서 직역하자면 '접속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번역자는 책의 내용을 관통하며 역설적으로 '소유의 종말'이라는 제목을 골라냄으로써 원제목보다 더 강렬하게 주제가 다가왔습니다. 정말 멋진 제목입니다.

가끔 차림표를 보며 그 옆에 어설프게 적혀 한국인만 이해하는 한식의 영어 표현을 볼 때가 있습니다. 갇힌 표현보다는 소유의 종말처럼 막걸리가 MacGirly로 널리 통용되면 좋겠습니다.

요즘 지방선거 단일화로 뜨겁습니다. 그동안 선거를 치르고 나면 우리네 민심이 얼마나 정확하고 핵심을 찌르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이번처럼 이슈는 산적한데 바람이 불지 않는 선거도 참 드물지 싶습니다. 그 원인이 허름한 야권보다 관록 있는 여권이 수비를 잘해서 그렇지 않나 합니다. 그럴수록 단일화로 바람이 일어나길 기대해 봅니다. 단일화라는 말이 반정부를 넘어 정책연대 혹은 가치지향적이길 바랍니다.

가까운 훗날, 파헤쳐진 4대강을 보며 그나마 여기서 삽질을 멈출 수 있었던 건 2010 단일화 덕분이었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막걸리가 코리아 라이스 와인을 넘어 막걸리로 불리길 기대하듯 2010 단일화는 정치적 갈등을 넘어 생태평화 출발의 시발점과 소유의 종말 원년이 되었다는 전설이 되길 앙망합니다. 천일이 지나고 나서 코리아 라이스 와인이 아니라 MacGirly라고 쓰인 막걸리로 건배하며 새로운 아이콘이 된 단일화라는 안주를 먹으며 파안대소하는 미래를 그려봅니다.

2010-05-08

서시 - 박목월

어머니를
나는 노래할 수 없다

나는 너무나
부족한 人間이므로

어머니는 너무나
크신 분이므로

어머니를
나는 노래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를 노래하려 한다

어머니를 노래하려고 애쓰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자랄 수 있으므로

나는 너무나
부족한 人間이므로

어머니를 나는
노래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를 노래하려 한다

어머니를 노래하려고 붓을 가다듬는 동안만이라도
마음속 가까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으므로

어머니를 노래하는 동안에 나는
걸음거리가 조심스러워지고

어머니의 사랑의 물줄기가 나의
가슴에 이어와서
내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어머니를 노래하는 동안만이라도 나는
마음에 환하게 등불을 켜지고
가슴이 더워 오는 행복감에 잦아 들게 된다

어머니/박목월/三中堂 1967 170원

오늘은 진종일 불효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어머니를 노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머니 가슴에 꽃도 달아드리지 말고
제대로 진상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삼백예순나흘 동안 어머니를 노래하며
어머니를 위한 꽃밭을 만들어야 합니다.
노래는커녕 삼백예순닷새 동안 진상이라서
오늘 하루종일 울고 있습니다.

2010-05-07

엠비, 정말 9단인 줄 알았잖아

1.
바둑에 관해선 문외한이지만 가끔 세계 기전을 중계하면 지켜보는 편입니다. 패싸움 정도는 아는지라 보는 재미가 여느 스포츠 경기 못지않게 박진감이 넘칠 때가 있더군요. 최근에는 바둑이 스포츠로 분류되기도 했죠.

바둑을 둘 줄은 몰라도 테레비 중계를 보며 다음 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맞추기라도 하면 대국장에서 맞짱을 뜨는 기사와 보는 눈이 같다고 좋아라 합니다. 눈썰미는 9단이 돼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기도 합니다.

한국 바둑은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해서 프로 입단이 엄청 어렵다고 하네요. 올림픽 양궁이나 쇼트트랙에서 메달을 따는 것보다 대표 선수로 뽑히는 게 어려운 것처럼 말이죠. 프로와 아마 바둑의 차이도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프로 기사가 되면 그 실력은 인정을 받은 것이고, 뛰어난 성적을 거두면 파격적으로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9단이 되곤 합니다. 물론 파격적인 승단 규정은 이창호 기사 때문에 바뀐 걸로 압니다. 그전까지는 짬밥을 중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걸출한 신인이 출현해서 강호를 제패하자 승단하는 조건을 바꾸게 됐지요. 이를테면 세계 기전에서 우승을 몇 번 이상 하면 단수에 상관없이 9단으로 높여 주는 것으로 말이죠.

단수가 현저히 낮은 기사에게 소위 입신의 경지라는 9단들이 판판이 깨지는 게 쪽팔리니까 그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창호 3단, 아무개 9단에게 불계승. 이런 소식이 일회성으로 그치면 사건이지만 번번이 그러니 9단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짬밥 높은 선배들 처지에서는 불쾌했을 겁니다. 일반인들이 보면 9단이 3단보다 실력이 삐리한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그래서 성적이 우수한 기사는 짬밥에 상관없이 9단으로 승격을 시켰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 상상입니다. 그렇지만 연공서열을 따지는 현실에서 파격적인 승단은 짬밥보다 실력이 우선이라는 뜻도 되겠고, 프로가 되면 그만큼 실력 차이가 없다는 말이겠지요.

바둑을 좋아하는 지인이 있습니다. 아마 5단이라고 합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대단하다고 하자 이런 말을 하더군요.

뭐, 별 거 없어. 바둑에서 프로가 아닌 이상 '아마 몇 단'이라는 말은 '도'자 하나 빠져 있는 거야. 아마 5단이라는 말은 아마'도' 5단이라는 뜻이거든.

검증이 안 된 동네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는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기도 어렵거니와 거품이 심하게 껴 있어 프로 몇 단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얘깁니다. 심한 표현을 쓰자면 허세라는 얘깁니다. 그 후로 아마 몇 단이라는 말을 들으면 빙그레 웃곤 합니다. 아마도 몇 단일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드니 말이죠.

2.
엠비가 9단인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 9단처럼 행실을 하고 다녔으니 그러려니 했거든요. 지금에 와서 야 밝혀졌습니다. 아마 9단이었다는 게 말이죠.

2010-05-06

문지야! 고마워

문지라고 있습니다. 원래 이름이 있지만 그냥 문지라고 부르겠습니다.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말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싫지 않았는지 둘만 볼 수 있는 편지(?)를 보내는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비밀 편지를 주고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문지가 제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아, 물론 제게만 보낸 건 아니랍니다. 내게만 보내면 티가 나니까 그걸 숨기려고 여러 명에게 보냈을 겁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선물이 도착한 날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어린이날 하루 전에 도착을 했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어린이날 선물을 받는 어른은 없거든요. 문지는 내가 성인인 걸 눈치채고 있을 텐데 어린이날에 맞춰 선물을 보냈던 거지요.

덕분에 어린이가 됐답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나이지만 마음은 모처럼 하얀 백지 같은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새 신을 신고 폴짝 뛰어보던 그 시절로 말이죠. 그런 기분을 느끼라며 보냈던 거지요.

선물은 새로 나온 책이었습니다. 소설가 김이설이 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단편을 모아놓은 소설입니다. 포장을 뜯자마자 작가의 말을 훑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작가의 고향이 예산이라는 소개를 보고 그곳에서 한우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답니다. 참 주책없습니다.

아차. 뜬금없이 책을 선물로 보내줬는지를 얘기하지 않았네요. 지난 책의 날에 문지가 내게 물었습니다. 마음 한 켠에 남아 잊지 못하는 시가 무엇이냐고요. 저는 퍼뜩 떠오르는 시가 있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였습니다. 그 시를 만나기 전까지는 첫눈이 내리는 이유를 몰랐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며 사랑하는 이들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합니다. 문지에게 이 시를 말해주자 책을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책을 선물 받게 됐던 겁니다.

그깟 책 한 권 받고 무슨 사설이 이리 기냐고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 같은 피박인생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랍니다. 더군다나 책을 받은 날이 어린이날 하루 전이었으니 그 기분이 설상가상이었습니다. 아차차. 설상가상이 아니고 금상첨화였습니다.

아무튼 문지 때문에 아주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어린이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길어서 내 맘대로 줄여 불렀는데 맘 상하지는 않았겠지요. 문지의 원래 이름인 문학과지성사라고 부르면 B사감이 연상돼서 그렇습니다. 그냥 내 맘대로 문지라고 부르며 소녀시대를 그리렵니다. 아무튼 문지야, 덕분에 기쁘고 고마웠어요.

2010-04-29

자유의 역설

1.
(...) 만약 자기 의지와 반대되는 반려자를 무리하게 맞이하게 되면 역으로 정말로 자기가 끌리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요. (...)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잘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로워지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연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자유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 강상중 『고민하는 힘』 사계절 2009 131쪽

2.
트위터가 이메일이라던 선관위는 선거기간 동안 4대강과 무상급식 문제에 대한 찬반 활동을 제한한답니다. 검찰은 천안함 침몰사고와 관련된 유언비어 유포에 대해 엄중히 처벌하기로 했답니다. 문화부 장관은 회피연아 패러디 동영상 유포자를 고소했지만, 가슴이 아파 용서하신다고 합니다. 경찰은 교육감 후보들 동향을 좌파와 우파로 나눠 관련 정보를 파악하라고 했답니다.

트위터를 이용해 경기도지사 선거 관련하여 설문조사를 했던 어느 유명 블로거는 선관위의 권고로 삭제했지만 자체적인 인지수사를 한다는 경찰에 의해 출두를 해야만 했습니다. 공권력이 우리 곁으로 시나브로 와 있습니다.

오늘 열시 정각에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천암함 영결식장에서 조사 낭독을 직접 하고 싶었던 가카는 화랑무공훈장을 손수 추서했답니다. 추도사를 들으며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또 적셨답니다.

잘 보입니다.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아주 잘 보입니다. 잘 보입니다. 가카의 눈물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잘 보입니다. 이렇게 잘 보이도록 역설의 시대를 만들어 주신 가카에게 감사한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백 년 만에 가장 추운 봄날 덕분에 한 뼘 햇살을 새삼 소중하게 느끼는 시대입니다.

2010-04-27

위생권력

1.
우리는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는 저항하지만 내면화된 위생권력에는 무력하다. 에이즈의 전염성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나서서 에이즈 보균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정책을 실시해도 그것에 쉽게 반대하지 못한다. (...) 바로 이 순간 위생권력은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 누군가가 사회적 보호와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추방될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무의식적 동의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 이수영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린비 2009 31쪽

2.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한다며 스스로 위생권력을 포기한 정부에 대해 분노하며 촛불을 들었다. 최근 구제역 확산 방지를 위하여 반경 3킬로미터까지 확대하여 살처분을 한단다. 구제역에 감염될 수 있는 발굽이 2개인 가축 수만 마리가 파묻히고 있다. 고온에서 익혀 먹으면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찜찜하니까 돼지고기와 소고기 소비가 감소했다. 전염병에 무자비한 위생권력의 모습에 동의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떡값을 받고 떡 치는 걸 좋아해서 떡검이라 불리며 구제역보다 더 은밀하게 확산되는 무리가 발견됐다. 살처분해야 한다. 살처분 없이 어물쩍 넘어가면 대다수가 동의한 줄 안다. 위생을 포기한 권력은 국민이 먼저 권력을 살처분한다. 쌓이고 쌓여 위생이 정말 엉망일 때, 그때 말이다.

2010-04-24

피박인생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

사건의 시작은 우연이었다. 어제는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의 날이었다. 책의 날이라는 것도 버릇처럼 트위터에서 눈팅을 하다 알게 되었다. 새로고침을 하며 출판사 트위터 계정에서 하는 이벤트를 흘려 보다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잊지 못할 시에 대해 말해 달라는 멘션을 본 것이 시작이었다.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시라... 퍼뜩 떠오르는 시가 있었다.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이 내리는 이유를 알 게 해주었기에 해마다 찬바람이 불 때면 생각이 나서 주저 없이 답글을 달았다.


답글을 달면서도 이벤트에 당첨이 되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심이다. 피박인생은 면피만 해도 본전인지라 이벤트 덕분에 잠깐이나마 좋아하는 시를 생각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당첨자 명단에 피박인생 아이디가 껴 있었다. 세 번을 확인했다. 맨 꼬래비에 붙어 있는 걸 봐서는 턱걸이(?)임에 틀림없다. 턱걸이면 어떠리. 이벤트와는 영영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떡하니 당첨했으니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제비뽑기를 해서 화장품 세트에 당첨되었던 일이 마지막이었다. 밀레니엄이 오기 전에 일어났던 세기 말의 추억이다. 그러니 어이 아니 기쁘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억누르며 당첨소감을 밝혔다.


푼수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할 수 없다. 당해보지 않는 자(?)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알 리 없으면 말을 하지 마시라. 주최 측인 문학과지성사(@moonji_books)의 문학적이고 지성적인 답글을 보라. 피박인생의 구구절절한 당첨소감에 감동을 먹지 않았는가!


문학이나 지성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피박인생이지만 책의 날에 대박이 났다. 경품으로 날라 올 책이 일 년 후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대박 난 이 기쁨을 두고두고 설레며 이어가고 싶어서다. 다만, 맘에 걸리며 미안한 게 하나 있다. 책꽂이를 훑어봤는데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한 책이 눈에 띄질 않는다. 어딘가 한 권이라도 꽂혀 있겠지만 찾지를 못하겠다. 이러다 서점에서 책을 집으면 지은이나 제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출판사인지를 먼저 보는 습관이 생길 것 같다. 아무렴 어떠랴. 피박인생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런 습관 하나쯤 생기면 어떠리.

2010-04-21

타락한 명사

명사(名詞)는 사물의 이름을 나타내는 말로 조사의 도움을 받아 다른 말과의 문법적 관계를 나타냅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동관 (주로 여자들이 쓰는) 대에 붉은 칠을 한 붓
시중 옆에서 보살피거나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는 일
인촌 이웃 마을
상수 남보다 나은 솜씨나 수, 또는 그 사람. 고수
준규 준거할 기준이 되는 규칙

명사는 인간을 만나 사람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름은 자기를 나타내는 것임에도 정작 스스로 붙인 것은 아닙니다. 이름은 누군가 깊고 좋은 뜻을 가진 명사를 붙이며 부르는 순간 비로소 의미가 있는 고유 명사가 되지요. 그런데 고유명사가 변질되어 개고생 하는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동관 기자회견을 하면 뒷조사를 할 수밖에 없다며 겁박하는 펜대 출신 대변인
최시중 여성들이 직업을 갖기보다는 '현모양처'가 되기를 바란다는 최첨단 위원회 우두머리
유인촌 누굴 쫓아내려고 회의 때 반말로 지시를 하면서 모욕을 주는 탤런트 넘치는 장관
안상수 강남 부자 절에 현 정권에 비판적인 좌파 스님을 놔두면 안 된다는 율사 출신 의원
김준규 출입기자들에게 촌지추첨 이벤트를 여는 사정 기관 우두머리

좋은 뜻이 있는 명사라 해도 가끔 인간을 잘못 만나 아주 다른 뜻이 되어 타락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름값도 못한다는 말이 나왔겠지요. 요즘 타락한 고유 명사가 부쩍 늘어난 느낌입니다. 오늘 부도덕한 인간을 만나 타락한 또 하나의 명사를 추가합니다.

기준    기본이 되는 표준
박기준 성폭력 예방 칼럼을 쓰면서 스폰서에게 성상납을 받는 법조인

고유명사(固有名詞)가 타락명사(墮落名士)가 됐습니다.

2010-04-19

좋은 사람들의 원칙과 믿음

1.
성업 중인 암살자가 있습니다. 그 암살자는 여자와 아이는 절대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죠. 간혹 억만금의 돈과 함께 그런 청부살인이 들어와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런 원칙 때문에 암살자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가끔.

2.
사랑을 소망하는 교회에 유명한 장로님이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기도하며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 죄를 사하여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죠.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망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다른 이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건 넘치게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장로님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2010-04-17

왜 꼴통들은 무상급식을 두려워할까?

다가오는 지방선거의 최대 이슈는 무상급식이다. 4대강 저지와 반MB를 내세운 정권심판론도 있지만 독고다이 삽질은 선거 결과를 마이동풍처럼 흘리며 마이웨이를 외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정권심판론보다 생활 밀착형 공약이 그나마 약발을 받는 지방선거이다 보니 그렇기도 하다.

이렇게 무상급식이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지난해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도의회에 제출한 무상급식 예산을 한나라당 의원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며 전액 삭감한 사건이 전국적 쟁점이 되면서다. 이후 여권에서는 무상급식을 좌파적 포퓰리즘이라며 잠재우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럴수록 무상급식 문제로 들끓었고 급기야 지방선거의 화두로 떠올랐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왜 그들은 무상급식을 나라가 결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반대를 했느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좌파, 우파 혹은 진보, 보수를 매끈하게 구분하는 기준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림은 여러 자료를 참고해서 내 마음대로 그린 것이다.

먼저, 가로축은 정치적 경향을 나타낸다. 보수는 체제를 유지하려는 자이고, 진보는 체제를 개선하려는 자를 말한다.

세로축은 경제적 성향을 나타낸다. 자본주의 대척점이 공산주의지만 공산주의는 이념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고 사회주의로 대신한다. 현시점에서 자본주의는 FTA를 찬성하는 신자유주의로, 사회주의는 FTA를 반대하는 반신자유주의로 대치해도 무방하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당을 위치해 보자. 좌표값의 고저는 있겠지만 저 구간에 위치한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위치한 구간(①)을 우파라 부르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위치한 구간을 좌파(②)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극우파는 어디쯤 있을까? 극우파는 보수의 끝과 자본주의의 끝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극우파가 변질되어 요즘은 가스통을 들고 나오는 보수꼴통으로 변했다. 보수꼴통 대척점에는 좌빨이 있다. 좌빨은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처럼 체제 변방이나 그 너머에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정한 좌빨은 이상주의자다.

한나라당은 참여정부를 좌파라고 불렀고, 노무현은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했다. 이는 한나라당과 참여정부 스스로 가로축의 어디에 위치하느냐 하는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좌파는커녕 중도(원점)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중도실용정부라며 나불대는 이명박 정부는 극우파에 가깝다. 이는 앞서 언급한 FTA 찬성 여부를 가지고 가늠하면 명확해진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고민하지 마시라. 우리는 그때그때 다르다. 우리는 세월 따라 이슈에 따라 구간을 넘나들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신념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대기업 사장이면서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에 당원회비를 내는 이도 있을 것이고, 노동자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FTA를 열렬히 찬성하는 신자유주의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향은 혈액형과 같다. ABO식으로 묶지만 똑같은 피는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자, 이제 무상급식 문제로 돌아가 보자. 무상급식 문제가 떠오르자 한나라당(우파라 칭하고 꼴통이라 부른다)은 왜 그렇게 거품을 물며 반대를 할까? 한마디로 말하면 우파는 좌파가 내세우는 무상급식이 몰고 올 패러다임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여기서 민주당은 제쳐놓자. 눈치를 보다가 슬쩍 찬성하는 쪽으로 붙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내세운 뉴타운 공약을 따라 했던 전력을 봐서는 존재감을 무시해도 좋을 듯싶어서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극우파의 역사였기에 극우파가 아닌 자는 모두 좌파로 불리게 됐다. 극우파가 득세한 역사로 말미암아 극우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좌빨로 몰리며 명맥을 잇기에도 급급했다. 좌파는 씨앗조차 뿌릴 수가 없어 몰래 간직만 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무상급식이라는 우량종자가 던져졌고, 시대적 상황은 물을 뿌리며 튼실하게 기르려고 한다. 꼴통들은 보기보다 위험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꼴통들은 이 현상이 단순한 나와바리 싸움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무상급식이 실현되면 그 뒤를 이어 복지와 분배, 환경과 생명의 시대가 도미노처럼 오리라는 걸 느꼈다. 꼴통들은 좌파 포퓰리즘이 두려운 게 아니다. 새로운 물줄기를 감당하기가 벅차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걸 지진을 피하는 쥐새끼처럼 직감했다.

6.2 지방선거는 정권심판일 수도 있고, 4대강 살리기 삽질을 늦추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적어도 강산이 한번 변하기 전에는 가스통이 날뛰는 세상에서 울화통을 삼켜야 한다. 무상급식에 찬성하든 아니든 물갈이를 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죽어가는 4대강을 연명하게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패러다임을 전환하며 사고의 틀을 확장하는 일이다. 싫든 좋든 무상급식은 새로운 사회로 도약하는 시대정신의 출발점이 됐다. 꼴통들은 무상급식을 도미노의 첫 패로 보고 있다.

2010-04-03

촛불보다 투표가 더 중요한 이유

  • 사실 민주화운동 진영이 그동안 부패하지 않은 것은 부패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
  • 노 전 대통령은 결코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볼 수 없다. 그 같은 노 전 대통령이 그리워지는 한, 앞으로 한국정치의 희망은 없다. (46)
  • MB의 지난 일 년간의 업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가장 양극화를 심화시킨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벗겨주고 이를 자신이 차지한 것이다. (99)
  • 근본적으로는 민주당이 능력도, 투지도 없기 때문이다. 여당 시절에는 다수의석을 가지고도 개혁입법안을 관찰시키지 못하는 무능을 보이더니, 야당이 돼서도 여당의 독주를 막지 못하는 무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허긴 없었던 능력이 갑자기 생기겠는가? (119)
  • 진짜 문제는 이 대통령과 현 정권이 이에 그치지 않고 오만하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 한마디로, 부패하고 무능한 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형태로 판단한다면 '최악의 경우'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아찔하기만 하다. (155)
  • 현재의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에도 그 핵심에 존재하는 것은 MB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다. (194)
  •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 이탈리아의 위대한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위기'를 이처럼 정의한 바 있다. 그렇다. 현재는 위기다. 낡은 신자유주의는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고 있다. (271)
  • 최근 이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은 최장집 교수가 잘 지적했듯이 그동안 민주당과 진보진영이 MB를 악마화해 MB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치를 너무 낮춰 놓은 것에 기인한 점도 크다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280)
  • 때로는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투쟁일 때도 있는 법이다. (367)
  •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양극화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정신이다. (...) "정의와 연대의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연대의식이 없는 정의란 전두환 정권처럼 가장 추악한 불의와 폭력이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375)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손호철/해피스토리 20100208 376쪽 13000원

MB를 넘는 것이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 야당 시절에 보여줬던 한나라당의 절반도 못하고 있는 민주당에 대한 쓴소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양극화를 심화시킨 것에 대한 자기반성과 대안 제시 없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이용하려는 야권(민주당과 국민참여당)에 대한 질타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래서 위기다. MB를 넘어설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패와 무능함에 오만까지 더한 MB 정권에 대해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는 풀뿌리 복지와 평화 그리고 생태를 위한 정치를 제시하고 있다. 촛불로 의사표시를 했지만 오만한 정권은 바뀐 것이 없다. 이것이 촛불보다 투표가 더 중요한 이유다.

2010-04-01

한국, 세계 최초 쥐박멸 국가가 되다

우리나라가 오늘 7시 47분을 기해 세계 최초로 '완전 쥐박멸국가'가 된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쥐박멸운동국민행동본부는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쥐를 잡자는 쥐박멸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결과 4월 1일 7시 47분을 기해 전 지역에서 쥐를 박멸했다"고 밝혔습니다. 행동본부 사무국장 전궁민(全窮民, 88) 씨는 "국민의 정신적 건강과 종교적 측면에서 쥐 없는 국가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이를 위한 박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동안 쥐 한 쌍은 일 년에 1,250마리까지 번식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쥐새끼는 건강에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도 일종의 '죄악'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이 시각 현재 국민행동본부는 수도 서울 모처에 있는 지하 벙커에서 마지막 남은 쥐 한 마리를 생포했으며, 이에 대한 처리를 놓고 고심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소식통에 의하면 마지막 쥐새끼라는 상징성과 생물 보존을 호소한 유엔 사무총장과 쥐20 정상들의 간곡한 권고를 받아들여 2MB 용량의 전자발찌를 채워 자연 소멸할 때까지 관찰하기로 결정하고 방목지로 청계천과 독도를 놓고 고심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한편, 정부는 전국에 있는 쥐구멍을 후손에게 물려 줄 자랑스러운 자연유산으로 지정하기로 했으며, 마지막 쥐새끼를 방목하기로 한 오는 6월 2일을 임시 공휴일로 정하고, 이날 국민 모두에게 쥐포 4마리씩을 무상급식하며 쥐박멸을 기념하기로 했습니다.

로이터 통신은 'Korea The First Nonmouse Nation'이라는 머리기사와 함께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캠페인을 앞세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범국민적 차원의 대대적인 쥐박멸운동이 벌어졌다고 전하며, 쥐박멸운동이 결실을 거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처음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상은 2010년 4월 1일에 전해드리는 희망 속보였습니다.

2010-03-31

樂書 인물열전

이외수
이외수 선생은 고딩시절 아이큐가 86이었고, 적성은 잡초뽑기였다고 한다. 우리는 엄청 가능성이 높은 부류라는 희망을 주는 소설가 1위.

장동혁

촌철살인 개그는 아니다. 그냥 사실이다. 사실을 말하면 낼부터 짤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요상한 시대, 상식이 무죄 판결을 받는 게 뉴스거리인 세상에 사실을 쿨하게 샤우팅 하는 개그맨 1위.

김영삼
왕년에 말없이 단식했을 때가 유일하게 전성기였던 정치인 1위.

유인촌
최장수 문화부 장관이자 문화강간도 최장수로 한 인물 1위.

전여옥
소설은 마지막까지 존재할 가내수공업이라는 어느 소설가를 제일 싫어하며 립싱크 같은 글을 쓴 정치인 1위.

오세훈
YS가 단식했을 때가 전성기였다면 정치자금법 만들고 은퇴했을 때가 전성기였던 정치인 1위.

안상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행불의 달인이라고 쓰여 있을 것 같아 입술을 집게로 콕 집어 빨랫줄에 널어두고 싶은 정치인 1위.

나경원
다리가 부러져 입원하면 깁스하자마자 밥도 못 먹고 누워있는 내과 병동으로 휠체어를 타고 가 상냥하게 웃으며 짬뽕을 드실 것 같은 정치인 1위.

이명박
독창적인 것이 없어 뭘 해도 2위인 대통령. 위기시 최전방을 제일 처음 찾았다고 하지만 평양까지 갔었던 국가원수가 둘이나 있다. 지금 하야해도 2위다.

2010-03-28

우리 시대의 끝나지 않은 이정표

  • 우리는 침묵에 주목해야 한다. 1984년, 미국의 침묵하는 다수는 로널드 레이건에게 투표하기를 거부했다. (...) 레이건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는 32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런데 겁 많은 언론과 잘 속는 대중이 이 결과를 '압도적인 당선'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34)
  • 정부는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민중이 삶,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동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정부다. 정부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할" 권리가 있다. (41)
  • 이미 입증됐듯이(그리고 모든 부르조아 혁명, 사회주의 혁명, 민족주의 혁명이 뒷받침해 줬듯이), 그 어떤 형태의 정부일지라도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자신들의 야망을 제한하려 하지 않는다. (54)
  • 분노한 민중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고 다함께 행동할 때, 새롭고 억누를 수 없는 힘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64)
  • 교육은 권력과 부의 분배를 기존대로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151)
  •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사회적 선(善)이다. 그리고 그릇된 생각이나 심지어 부도덕한 생각일지라도, 생각을 교환하는 행위 때문에 개인의 삶과 자유가 그 즉시 위험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그러나 애국주의 열풍에 휩싸인 최고법원은 급진주의자와 평화주의자의 간행물에서 즉각적인 위험성을 찾아내려고 할 때가 많다). (193)
  • 지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강제력에 직접적으로 대항할 수는 없지만 국가권력을 정당화하는 속임수를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25)
  • 학계에는 정부 당국의 정치적 영행력과 기업의 경제력이 존재한다. 이들의 관심사는 대학이 기존 사회구조의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지,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사람들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다. (229)
  • 민주주의의 번드르르한 상징인 선거는 사회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대중사회를 빈틈없이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295)
하워드 진, 역사의 힘/하워드 진/이재원 옮김/예담 20090724 304쪽 15000원

하워드 진이 역사에 대해 썼던 에세이 25편을 모아 놓은 책이다. 언제나 현장에 있던 그가 다양한 주제로 역사의 힘을 알려준다. 1960년대부터 쓴 글들은 시공을 초월해 지금 우리 모습을 담고 있다. 역사가 선택과목이 된 시대에 행동과 양심이 얘기한 짧은 글에서 먼저 밟고 간 발자국이 보인다.

지난 1월 27일, 향년 88세로 타계한 하워드 진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글을 남겼다.
- 미국인들은 지금 오바마의 화려한 언변에 현혹되어 있다. 오바마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는 전국적인 운동이 없다면 그는 그저 그런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시대에 '그저 그런 미국 대통령'이란 위험한 대통령을 뜻한다.

하물며 우리는...

2010-03-25

대한민국은 복권공화국이다

대한민국에는 두 가지 복권이 있다. 로또복권과 사면복권. 로또복권은 대를 이어 벼락 맞을 확률보다도 적지만 사면복권은 한 사람을 콕 집어 당첨시킨다. 로또복권에 당첨되려면 꿈에서 돼지를 보거나 조상이 나타나야 하고, 사면복권은 수척하게 보이는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법원에서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있어야 당첨된다.

로또복권은 당첨돼야 삼분의 일을 세금으로 떼어 가지만 사면복권은 세금을 많이 꼬불칠수록 당첨이 된다. 로또복권은 당첨되고 잠적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면복권은 당첨되고 나서 오히려 화려하게 나타난다.

로또복권은 '행운의 복권 공공의 감동'이라며 국무총리가 관리하고 18세 이하는 판매를 하지 않고, 사면복권은 '특별한 복권 소수의 공감'이라고 하며 대통령이 판매하고 18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대한민국은 복권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복권은 권력에게 있고, 모든 당첨자는 권력으로부터 나온다.

2010-03-23

진짜 운동권 스님들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병역면제가 된 어떤 정치인이 용산참사 유가족에게 1억원을 전달한 봉은사 명진 스님을 가리켜 '좌파 스님' '운동권 스님'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현 정권에 비판적인 강남의 부자 절 주지를 그냥 놔두지 말고 자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네요. 내 맘대로 넘겨짚으며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죠.
- 명진 스님이라는 봉은사 주지가 현 정권에 비딱한 좌파 운동권이니 자르세요.

명진 스님이 현 정권에서 벌이고 있는 우측통행을 거스르고 좌측통행만을 고집하는 좌파인지는 보질 못해서 모릅니다. 더군다나 명진 스님 이마에 소림사 승려들처럼 점이 없는 걸로 봐서는 쿵푸를 잘하는 운동권 스님도 아닌 걸로 보이고요.

ⓒ연합뉴스
해서 운동권 스님을 자르라고 한 그 정치인에게 진짜 운동권 스님들이 누군지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대산 월정사에 가면 만월 야구단이라고 있습니다. 야구공의 실밥이 108개라며 중생의 번뇌와 연관성이 있어 야구를 시작했답니다. 월정사가 운동권 사찰인 것은 비단 야구단만이 아닙니다. 야구단을 만들기 전부터 월정사 주지배 평창군 족구대회를 개최하여 신부님팀과 맞짱을 뜨는 열혈 운동권 사찰이었습니다.

행방불명으로 병역기피를 하신 정말 잘난 정치인님아. 예비역 병장 출신 스님을 자르려고 하지 마시고 오대산에 가면 족구하고 야구하는 운동권 스님들이 잔뜩 있습니다요. 님이 자르려고 하는 진짜 운동하는 스님들이 궁금하시면 누군지 보시고 오시어요. 그럴 리가 없겠지만 자르려는 걸 눈치챘다 싶으면 머리를 잘라주러 왔다며 둘러대면 됩니다.

글구 정계은퇴를 하라는 말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병역기피 주특기를 살려 이번에는 기억 회피로 버티다 행방불명이 된 후 진짜 고령이라는 이유로 슬그머니 나타나면 되십니다. 병역기피 시절에는 사시에 합격했으니 이번에는 외무고시나 기술고시에 붙으면 대박이고요.

2010-03-20

이스라엘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얼마 전, 두바이에서 발생한 하마스 간부 암살에 모사드가 개입한 흔적이 드러나며 이스라엘 총리까지 연관됐다는 국제 뉴스를 접하고 왜 그런 일이 반복되는지 뜬금없이 궁금했다.

그곳에 예루살렘이 있고, 예수가 태어난 곳이지만 유대교를 믿고 있다는 것. 홀로코스트와 6일 전쟁. 이것이 내가 아는 이스라엘에 대한 전부다. 중동에 관한 이미지는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피해자였고, 주변을 에워싼 아랍인과 이슬람에 대항해 선조의 땅을 지키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을 읽기 전까지는.

지은이는 2000년부터 중동 현지 취재를 하며 21세기 화약고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중동은 유일신이 내린 약속의 땅이라며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를 세우면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의 참혹한 삶을 얘기한다. 특히 전쟁이라는 폭력은 여성과 어린이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있다. 종종 뉴스로 접하는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은 팔레스타인 땅에 자국민을 이주시키는 일종의 식민 마을이다. 정착민들은 합법적으로 무장하고 팔레스타인을 체포할 수 있다. 급박한 위험에 처한 경우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총을 쏠 수도 있다. 생트집을 잡아 쏘아 죽여도 처벌받을 확률은 거의 없다. 정착촌보다 더 열악한 이스라엘 감옥에 있는 팔레스타인 죄수는 이스라엘 점령자들에게는 '두 발 달린 짐승'일뿐이다.

책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에 관한 역사를 통해 전쟁과 테러가 반복하게 된 원인을 자세히 알려준다. 아이러니한 것은 종교적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과 아랍인은 같은 선조를 두고 있다고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후처 태생의 맏아들 이스마엘과 본처 태생의 둘째 아들 이삭이 있었는데 코란은 이스마엘이 메카로 옮겨가 아랍인의 선조가 됐다고 하고, 유대 경전은 이삭이 유대인의 선조가 됐다고 한다.

같은 선조를 두었음에도 숱한 피를 흘리게 된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2000년부터 시작해서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포와 함께 총성과 테러가 출현했고, 그 이면에는 사악한 영국과 미국의 농간이 숨어 있다.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다. 고로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짓도 면죄부'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홀로코스트를 이용하곤 했다. 할리우드를 지배한 유대인 자본과 유대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까지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국과 이스라엘 간의 정치적 유착으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있다. 막강한 이스라엘군에 저항하려고 '약자의 무기'인 자살폭탄 테러로 맞서는 하마스 창립자 야신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네 한국도 한때 일본 식민지였다고 알고 있다. 그 시절 일본에 저항했던 운동가를 한국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느냐."

우간다 엔테베 공항 기습작전이나 뮌헨 올림픽 참사로 유대인은 역사적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눈물의 땅, 팔레스타인》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것만큼 전혀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 줬다. 그동안 유대인은 일방적 희생자라는 시각도 알게 모르게 미국-혹은 미국식 교육-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떠한 목적으로도 전쟁과 테러는 반대하지만 왜곡된 시각이 균형을 맞추며 팔레스타인의 고통과 투쟁의 당위성을 볼 수 있게 됐다.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김제명/프로네시스 20090915 365쪽 18000원

2010-03-14

존엄한 섬김이 똥을 꽃으로 만든다

  • 낯 뜨거운 책이 나오게 됐습니다. 제 아내가 지적했듯이 "자기 혼자 어머니 다 모신 것처럼" 비칠까봐 여기저기 눈치가 보입니다. (10)
  • 어머니 곁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어머니 눈은 겁을 머금고 있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겁먹은 눈초리. 그것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49)
  • 방안에는 묵은 된장 같은 똥꽃이 활짝 피었네. 어머니 옮겨 다니신 걸음마다 검노란 똥자국들. (...) 진달래꽃 몇 잎 따다 깔아 놓아야지. (50)
  • 옷에 똥을 누는 사람보다 그 똥을 치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배는 행복한 줄 알라는 소리로 들려왔다. (52)
  •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들이 치매다. (95)
  • 어머니. 어릴 때는 누구나 코 흘리고 젖 먹고 그럽니다.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예요. 부모가 고생고생하다 병들고 늙으시면 옷에 오줌도 누고 잘 걷지도 못하고 그러는 거 그것도 당연한 일이예요. (143)
  • 어머니를 모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내 가슴에 자리잡아 간 것이 바로 '존엄'이다. (155)
  • 사랑과 정성은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오로지 약과 병원과 음식이 한결같은 처방들이다. (160)
  • 병든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일은 의무감에 가까운 효심만으로는 어려울 듯하다. 어머니 모시는 데서 오는 그 어떤 깨달음과 기쁨이 있어야 서로 지치지 않을 것이다. (247)
  • 사실 자식 키우는 정성에 반만 하면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거든요. (249)
똥꽃/전희식, 김정임/그물코 20080305 250쪽 12000원

어머니의 똥이 꽃으로 보일 수 있을까. 머리로는 존엄을 외치지만 치매 걸린 어머니 똥 위에 진달래꽃 따다 깔아 놀 섬김 한 올이라도 가슴 깊은 한구석에 있는지 찾질 못하겠다. '자식이 없는 삶은 가능하지만 부모가 없는 삶은 없다'고 하면서 사이버 일촌보다 더 멀게 안부를 물으며 평생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자식이란 부모의 존엄을 갉아먹으며 사는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다.

2010-03-08

다시 1981년을 지나며

1.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일본과 기술 차이가 얼마나 나는가를 비교할 때 올림픽 개최시기와 비슷하다는 말이 있었다. 일본은 1964년에 동경 올림픽을 개최했고, 우리는 1988년에 열었다. 동경 올림픽에서 일본은 29개의 메달을 따서 종합 3위를 했고, 우리는 굴렁쇠를 굴리며 개막을 하고 33개의 메달을 따 종합 4위를 했다. 24년 차이가 난다. 기술이나 시민의식 차이가 일본에 딱 그만큼 뒤처져 있었다.

2.
벤쿠버 올림픽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다. 메달의 색깔에 구애받지 않고 활짝 웃는 선수들이 보기 좋았다. 그런 모습과 어우러져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관심과 성원을 보내는 응원은 과거보다 성숙해졌다. 아울러 방송 3사가 왜 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특정 방송국에서만 중계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좋았다. 아나운서나 해설자 목소리는 빼고 국제방송신호만 송출해주었으면 금상첨화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올림픽 기간 동안 단독 중계방송을 놓고 티격태격하며 서로 물어뜯던 방송사가 언제 그랬느냐며 같은 화면을 같은 시간에 같은 목소리로 중계방송을 하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2010 국민대축제라서 그랬나.

3.
1981년 5월 28일부터 닷새 동안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 국민축제가 열렸다. 국풍81이라는 이름으로. 민심을 현혹하기 위해 추진한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정책의 시작이자 대표작이었다. 비교가 생뚱맞지만 2010 국민대축제와 국풍81을 놓고 보니 딱 한 세대 뒤로 빽도를 했다. MBc 역주행은 지금 1981년을 지나고 있다. 딱 하나 다른 것은 국풍81에는 군인과 공무원을 학생으로 위장 참여시켜 닷새를 했고, 국민대축제는 방송 3사가 자발적(?)으로 하루 저녁만 했다는 점이다.

4.
이런 축제는 바람처럼 훅하고 얼른 지나가길 바라며 오래된 이용원에 누워 뜨끈한 수건을 얼굴에 덮고 면도칼 가는 소리와 함께 낡은 진공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용의 바람이려오가 듣고 싶은 날이다.

2010-03-03

미리 하는 MBc의 최대 업적

가카(閣下)가 가카(脚下)된 시대에 다시 가카(閣下)가 되고자 부지런히 삽질을 하였고, 당신이 삽질을 하면 할수록 우리 미래는 더 깊게 묻혔다. 정의사회구현으로 포장됐던 암울한 시절로 냅다 역주행을 하며 다시 돌아가 구세대에겐 혹독한 보충수업의 기회를, 신세대에겐 불행한 역사체험의 장을 마련하며 더는 내려갈 바닥이 없게 아주 깊이깊이 삽질을 했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를 더 이상 낮은 온도가 존재하지 않는 절대 영도로 만들었다.

MBc, 가카(閣下)가 되려고 국민을 궁민(窮民)으로 만들어 파묻은 한국산 피나투보 화산1이었다. 앞으로 1000일 동안 반전은 없다. 절대 영도의 시대니까.


1. 필리핀 루손 섬에 있는 피나투보 화산(Mt. Pinatubo)이 1991년 6월 폭발을 하였다. 화산 폭발로 말미암아 847명이 사망하였고, 25만여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화산재는 지상 30km까지 치솟았고, 1745미터이던 산이 화산 폭발 후 1485미터로 낮아졌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2년 동안 지구 전체 기온이 섭씨 0.6도가 내려갔고 그 효과가 몇 해 동안 지속됐다. 당시 언론은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유럽 일대에서 새빨간 노을의 장관이 펼쳐진 바 있다고 전했다. 피나투보 화산 폭발은 20세기 최대의 화산 폭발이자 재앙이었다.

2010-02-17

내 꿈은 배부른 소크라테스

뭐 사랑하고 애정하자는 얘기를 조동이로만 하는지라 언행일치나 솔선수범과는 애시당초 어울리기가 거시기합니다. 어찌 보면 애정이 결핍된 상태에 가까워 지청구하는지도 모르겠지요. 너만은 배부른 돼지보다는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돼 달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나 혼자선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길 염원하고 있답니다. 참 나쁘고 못된 놈상이지요.

세상살이를 비틀고 씹어대지만 실상은 그걸 닮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정말 한심하고 인류발전을 저해하는 생물입니다. 만원 버스에 올라타며 왜 이리 인간이 많냐며 투덜대지만 정작 나 때문에 만 일원이 됐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단세포 아베마만도 못한 생명체이기도 합니다. 진정 신이 존재한다면 최우선 리콜 대상이랍니다.

이런 단세포 기생충이자 유해 미물도 MBc를 보면 참 대단한 양반이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그 양반이 위대한지 참모들이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빅 이슈를 만들며 투쟁의 대상을 분산, 아니 현혹시키는 재주는 탁월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지금은 세종시를 가지고 집안싸움을 하며 야당마저 그네씨를 우러러보게 만든 걸 보면 그 재주가 가히 인간의 것을 초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고픈 꿈을 가져 인류발전을 가로막는 제게는 MBc가 여전히 4대강을 임기 내에 파헤칠 게 눈 앞에서 아른거립니다. 세종시가 기업도시가 됐든 행복도시가 됐든 MBC 엄사장이 퇴임을 했든 요런 건 다음에 바로 잡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4대강을 파헤쳐 놓으면 적어도 한 세대 후에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고, 그 후 대대로 원위치를 하려고 해도 어림없는 일이 되고 말 겁니다. 오천년 전 단군신화를 얘기하면서 동시에 백 년 전 굽이치며 흐르던 푸른 강물을 전설처럼 얘기하는 후손을 두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MBc는 성동격서라는 위대한 마케팅을 하고 계시며 경제를 살리자는 공약을 미루어 짐작하면 인천 공항도 돈 내고 구경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전기세가 아까워 촛불을 켜고, 몸이 아파도 민간요법으로 버티는 세상을 꿈꾸는 양반이기에 실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을 걱정하던 선구자는커녕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꿈꾸는 속물이지만 전설로 남을지 모르는 4대강 삽질을 조금이나마 늦추고 싶습니다. 이것이 지금 숨을 쉬는 존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6월 2일. 믿을 놈 하나 없지만 찍을랍니다. 최선이 아닌 차선이라도 선택을 할 수 있게 기호 2번으로 뭉치길 기대합니다. 뭉치지 않으면 적어도 십 년 동안은 어버이연합회가 득세하는 세상이 될 겁니다.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꿈꾸는 놈상은 한반도 이북은 금강산만 가 본 지라 잘 모르겠지만 한반도 이남은 시방 아락실이 절실한 세상이라고 느낍니다.

참으로 변비 같은 세상입니다.

2010-02-14

설날 아침에 지저귑니다


내가 그의 아이디를 폴로 하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아이디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아이디를 폴로 해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디엠이 되었다. 누가 나를 폴로해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디엠이 되고 싶다.

새해는 존재하는 모든 이가 디엠 하는 사이가 되길 빕니다. 무조건 건강하고 애정 합시다.

2010-02-11

라이방은 색칠하길 좋아한다

1.
민노당. 불법계좌. 정치자금. 100억. 55억. 돈세탁.
광우병과 이니셜이 같은 CJD(조중동) 신문과 김비서(KBS) 뉴스에 나오는 헤드라인만 살피고 전후 사정을 눈여겨보지 않은 이들은 이런 말을 할 겁니다.
- 민주노동당인데 돈이 저렇게 많아.
- 역시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군.
- 차떼기랑 다를 게 없네.
당장 나도 당비 입금 계좌를 선관위에 신고하지 않아 꼬투리 잡힐 일을 한 업무처리가 참 미숙했다는 생각이 드니까 말입니다.

2.
한강이라는 담배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라나. 330원이었던 한산도와 거북선을 피던 그 시절에 한강도 같은 값이었지만 12개들이인지라 상대적으로 비쌌던 담배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무 생각 없이 한 갑을 사서 뜯어보고 나서야 시가처럼 생긴 걸 알았고, 맛이 독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필터 끝에 새겨진 담배 상표도 거무튀튀한 겉모습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았고요.

입맛에 맞지 않아 몇 개 피우지도 않고 들고만 다녔는데 친구 한 놈이 오더니 담배 있으면 하나 달라고 하더군요. 시커먼 한강 한 개비를 건네줬습니다. 처음 보는 담배인지라 무척 신기해하던 놈상은 불을 붙여 깊게 한 모금 빨더니 말하더군요.
- 역시 러시안 시가는 맛이 좋아.
- 독하지 않아?
- 독하긴. 시가는 이 맛에 피는 건데.
- 사실 그 담배 국산이야.
- 시가처럼 생겼는데 거짓말하지 마시게.

담뱃갑을 눈앞에 들이밀며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한창 연기를 뿜어대며 맛있게 담배를 피우던 친구는 인상을 쓰며 말하더군요.
- 어쩐지 졸라 쓰더라.

3.
라이방을 쓰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DJ에게 빨간색을 칠했습니다. 그때 칠한 빨간색은 두고두고 따라다녔고, 좀처럼 벗겨지지가 않았죠. 지금 가카께서도 라이방 쓰는 걸 무척 좋아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민노당에 돈 칠을 하고 있습니다. 돈 칠을 하는 이유야 뭐 뻔하지 않겠습니까. 노동자를 위한 정당인데 돈도 많고 게다가 불법으로 세탁했다는 색깔을 덕지덕지 칠하는 것이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한강을 피워 문 그 친구와 별반 다를 게 없답니다. 겉모양만 보고 지레짐작을 하니까요. 담배 한 개비야 허허 웃으며 넘길 수 있지만, 빨간색으로 도배됐던 DJ는 아직도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어버이들에게 빨갱이라며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러시안 시가처럼 보였을 담배 한강은 별반 알아주는 이도 없이 단품 됐지만, 라이방을 좋아하던 이들이 칠한 색깔은 그렇게 세월이 흘러도 벗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라이방을 쓰고 빨간색을 칠한 가카가 정말 빨갱이 출신인데 말이죠.

문제는 민노당에 색칠하는 뽄새가 정말 치사하다는 것과 이런 색칠하기가 이제 시작이라는 겁니다. 가깝게는 6월 2일 지방선거 투표일까지 얼마나 많이 촌년 화장하듯 떡칠을 할지 벌써부터 역겹습니다. 검은 라이방이 색칠하길 좋아할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한마디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이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를 위해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2010-02-09

그들이 산으로 들어간 까닭은

  • 숨 쉬는 일은 누구나 다 하지만 숨 쉬는 일을 의식하고 그것에 깊이를 부여하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누구나 부모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에 눈 먼 헌신을 부여하고 미칠 듯한 기쁨을 누리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41)
  • 내가 울었던 만큼 상대도 울었겠구나, 내 고집 때문에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을 합니다. (52)
  • 문제는 차가운 세상이 아니라 거기에 나의 더운 온기를 보태는 일에 있음을. (53)
  • 우리가 언제 다시 지구로 올 수 있을까요. 생명체로 태어난 자체가 대단한 기적 아닌가 말이죠. 그럼 죽어서 천국을 가려 할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천국을 만들어야겠죠. (88)
  • 근래의 유행인 '웰빙well being'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의 이 문장들이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생존 차원이 아니라 뭇생명과의 경이로운 만남에서 행복과 감사를 느끼는 삶. 이것이 참으로 고수의 웰빙이 아닐까 싶다. (128)
  • 엄마! 사람이 죽은 뒤 천상에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다만 선행밖에 없어요! (204)
  • 고도高度만을 지향하면 정복자의 눈빛을 갖기 쉽다. (280)
  • 주자는 선비라는 존재를 이렇게 말했어요. 천명을 알아차려 못살고 못 입는 백성들을 위해 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드는 '사업事業'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322)
  • 문학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가내수공업 (385)
  • 머리 좋은 놈이 많은 세상보다 마음 좋은 놈이 많은 세상이 아름답다 (410)
산이 좋아 산에 사네/박원식/창해 20090710 415쪽 18000원

도회지가 싫어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싫어서 떠났던 도회지로 돌아간다고 한다. 산골에서 제멋대로 사는 선수들은 어떤 비결이 있기에 산기슭에 터를 잡고 눌러살고 있을까. 그 까닭을 회귀, 자유, 변신, 구도, 창작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그 선수들을 관통하는 딱 하나는 욕심을 버렸다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니 비로소 산은 일부가 됨을 허락하며 굶주리지 않게 했다. 경쟁과 생존을 다그치는 도회지에서 감히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지만 산은 무욕이 곧 자연스런 삶임을 깨닫게 한 것이 아닌가 넘겨짚어 본다.

산에 사는 선수들을 흉내 낼 엄두조차 나지 않지만 주렁주렁 매달린 욕심이 산을 오르면 그나마 쪼그라드는 이유가 그 까닭인지 싶다. 그래서 그들은 등산이 아니라 입산이라고 부른다.

2010-02-08

정동진 서쪽에는 방문진이 있다

1.
정동진은 한양(漢陽)의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터가 있는 부락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위도상으로는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도봉산의 정동쪽에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신라 때부터 임금이 사해용왕에게 친히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2000년 국가지정행사로 밀레니엄 해돋이축전을 성대하게 치른 전국 제일의 해돋이 명소이기도 하다. (두산백과사전 EnCyber)

2.
방문진은 1988년 12월 26일 제정된 방송문화진흥회법에 근거하여 설립된 기관이다. 방송사업자의 공적 책임을 실현하고 민주적이며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의 진흥과 공공복지향상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며 MBC의 최대 주주로서 경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방문진 이사들은 방송통신위원회가 임명하고 방통위원장은 MBc가 임명한다.

3.
정동진에는 모래시계 소나무가 있고, 방문진에는 설치류 꼬붕들이 있다. 정동진에서 정서쪽으로 가다 보면 문화방송을 집어삼키는 쥐새끼들로 득실대며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는 방문진이 있다. 한반도 동쪽에는 국내 해돋이 명소인 정동진이 있고, 서쪽에는 방송장악으로 세계적 명소가 된 방문진이 있다.

2010-02-04

간지

1.
'간지'를 목숨처럼 여기는 이 20대들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명랑함. 그렇다고 이들이 이명박이 싫다고 바로 민주당으로 가거나, 민주노동당 아니면 진보신당 같은 데로 관심을 돌릴까? 그럴 리가 있나. 많은 20대들에게 '간지'는 취향이 아니라 존재 이유다. 불의는 참아도 추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이 독특한 감성, 그것이 앞으로 펼쳐질 다음 세대들의 존재론 아니겠는가. '소녀시대' 노래를 들으면서 화려함을 꿈꾸지만, 정작 주머니는 빈털터리인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20대들 속에서 혁명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71쪽)
-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우석훈/레디앙 20090930

2.
불의는 참아도 추한 것은 참지 못하는 것이 '간지'를 대표하거나 모든 것은 아니겠지만 20대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인 까닭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빈털터리 20대가 꿈꾸는 화려한 혁명도 간지 있게 시작되고 있을 것이리라. 그런 20대가 이명박이 싫다고 다른 정당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는 정치적 취향은 나와 같다. 그렇다고 내가 간지남이라며 슬쩍 묻어가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간지남보다는 간사남에 더 가까워 슬프다. 아니 슬픈척하며 악어의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더더욱 간지나는 20대도 유통기간 동안 변질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20여 년 전,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왔다. 간지세대 20대나 간사한 40대 놈상에게나 오늘은 입춘이다. 입춘이 아무리 추워도 꽃은 간지 있게 필 게다.

2010-01-31

樂書 암


암이 나쁜 것은 자기가 빌붙어 있는 숙주(몸)를 죽이기 때문이다. 숙주를 죽이면 자기도 죽는 걸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죽자는 몹쓸 놈이다. 그래서 네가 암이라 불린다.

단무쥐
5년 단임제를 최고로 잘 이용하는 사람 닮은 단무쥐.
- 나는 다음 대통령 안 나올 사람, 인기 연연할 필요 없어

농한기
요즘 화투패 잡는 사람이 어디 있어. 쥐가 많아 쥐약놓고 쥐 잡는 재미로 살아.
근디 같은 약인데 쥐약은 보험이 되지 않는겨. 사람이 처먹는 약보다 더 비싸.

아이폰
아이폰이 열풍일수록 난 클래식이 더 끌린다.

익숙함
매일 오는 스팸도 하루 안 오면 궁금해진다.
가끔 폴로 하는 야한 언니도 뜸하면 기다려진다.
우리는 이렇게 점점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거다.
익숙함은 애정의 출발점이다.

꿰매고 싶은 입
우리 나와바리에서는 오바로꾸친다...라고 합니다.

매력
눈은 내리면서 소복히 쌓일 때까지만 매력있다. 눈물 흘리며 질척거리기 시작하면 정내미가 똑 떨어진다. 매력을 적당히 유지하지 않으면 한쪽으로 밀려나고 심하면 구박 받는다.

한파
고드름이 제 한몸을 겨누지 못해 스스로 투신하는 추위.
뽀뽀했다가는 조동이가 붙어버릴 것 같은 날.
냉장고 문을 열면 따뜻하게 느껴지는 날.

명박복음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누가복음 14:15)
강권하여 세종을 채우라 (명박복음 18:747)

실용주의
양키고홈을 외치는 사람도 가끔 맥도날 햄벅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고걸 꼬투리잡아 햄벅 먹는데 양키 음식 먹는다고 거시기하지 마시라. 그 사람은 양키가 미운거지 햄벅이 싫은 건 아니다. MBc가 싫은거지 실용주의가 그르다는 거 아니다.

2010-01-30

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

  • 제 시가 수능시험에 난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후배가, 당여히 제가 썼으니까 제가 잘 알 줄 알고, 이런 문제가 나왔는데 몇 번이 답이냐? 물어 왔어요. 그래서 대충 찍어 가지고서, 이건 이거고 이건 이건데 했는데, 다섯 문제가 나왔는데, 그 친구가 나중에 전화하기를, 제가 두 문제밖에 못 맞췄다고. 시는 정답이 하나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신경림 37)
  • 농부가 비오는 날, 맨발로 지게를 짊어지고 노을이 지는 산을 걸어간다. 이것은 화가에겐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하지만 막상 농부는 어깨 무겁고, 발바닥 저리고 대단히 고통스럽다. (박중훈 58)
  • 내비게이션과 같은 교육! 그러나, 내비게이션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오한숙희 72)
  • 20에 속하는 사람은 자기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지난 2008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보셨죠? 강남이 얼마나 열심히 공정택을 지지했는지요. 20에 속하 사람은 철저히 자기 계급 투표를 하는데 80에 속한 사람은 그렇지가 못하죠. (홍세화 160)
  • 내가 지금 불편하다고 불만이나 늘어놓으면 나중에 내가 파업할 때 누가 내 권리를 이해해 주겠는가? 우리가 지금 파업하는 노동자를 비난하면 지금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우리 시민의 권리까지 빼앗는 걸 왜 모르는가? (하종강 183)
  •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못 읽는 사람이고,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자로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에요. (진중권 217)
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노회찬 외/해피 스토리 20091111 222쪽 13000원

청국장과 곤드레밥이 웰빙 식품이라고 주목을 받지만 얼마 전까지도 그저 끼니를 때우던 보잘것없던 먹거리였다. 하얀 쌀밥을 쇠고기국에 말아 한 숟가락 뜨고 그 위에 장조림을 하나 찢어 올려 먹는 게 꿈이었던 시절에는 지긋지긋했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처럼 느껴지지만 불과 한 세대 전까지의 일이었다. 우리는 쇠고기국에 하얀 쌀밥을 먹을수록 청국장과 곤드레 밥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끼니를 해결하던 시절에는 정답도 하나였다. 흰쌀밥으로 대표되는 돈이 정답이었다. 웰빙 식품을 찾던 우리는 이제 웰빙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한다. 끼니 걱정이 없어지니 끼니가 소중해지고 더 찾는 시대다. 적어도 끼니라는 말에는 정과 어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에서 그런 작은 변화를 느끼며 끼니 같은 우리 시대 키워드를 찾을 수 있다.

시대는 당신에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 쉘위웰빙?

2010-01-28

기수의 나라

어제까지 내가 기억하는 기수는 우리나라에 둘 있었다.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세계 복싱 타이틀전. 국민소득 200달러이던 시절에 주최 측은 대전료 5만 5천 달러를 선불로 달라며 뗑깡을 부렸고, 정부가 보증을 선 끝에 타이틀 매치가 이뤄졌다.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 출신 벤베누티는 65전승을 거둔 강자. 김기수는 15회전을 겨루었고 끝내 2-1 판정승. 복싱이 전래한 지 반세기 만에 첫 챔피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기수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참 어울린다는 인상과 함께 여태 잊지 않고 있다. 한국 권투의 기수였던 김기수 선수.

배달의 기수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테레비에서 라시찬 소대장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괴뢰군을 때려잡던 시절, 아주 짧게 국군 홍보를 하던 프로그램이 배달의 기수였다. 반공일날 낮잠 올 시간에 하던 배달의 기수는 일이십 분 분량이었지만 기승전결이 확실해서 눈을 똑바로 뜨고 봤었다. 그 배달의 기수가 번개라는 이름으로 철가방을 들고 퀵서비스로 부활하면서 배달의 기수(?)는 또 다른 전성기를 이뤘다. 가히 배달의 기수는 세계 최고다.

이십일 세기 들어 점점 잊히거나 일상화돼 기수라는 이름이 평범하던 차에 새로운 기수가 나타났다. 시방 이명박은 17대 대통령이다. 가카의 모교에 계신 총장님도 17대 총장님이란다. 참 절묘한 타이밍인지 인연인지 모르겠다. 이 양반이 대교협 신임 회장으로 선출되는 자리에서 말씀하셨다.
- 우리나라같이 등록금 싼 데가 없죠. 교육의 질에 비해서 아주 싼 편이죠.
이 양반 함자가 이기수란다.

기수는 앞에서 기를 드는 사람이나 단체에서 대표로 앞장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기수나 배달의 기수는 기수라는 말이 참 어울린다. 배달의 기수가 체제 홍보를 한 면이 있지만 기수 자체를 들여다보면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를 앞장섰던 분들인지라 공식 행사 때 묵념을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여기에 뜬금없이 명함을 내민 양반이 이기수다. 이십일 세기 기수라는 뜻인가, 이명박 시대 기수라는 말인가. 가타부타 시비 걸고 싶지 않다. 딱 하나만 물읍시다. 총장님이 살고 계시는 우리나라는 어디 있나요?

덧1. 등록금이 싸다는 말을 듣고 대한민국 대학생들은 왜 돌을 던지지 않을까? 아니 왜 촛불을 들지 않을까? 사실 소고기보다 등록금이 더 급한데 말이다. 프랑스 68혁명이라는 걸 알기는 할까?
덧2. 등록금은 이명박 이전에 오르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운 거 아니다. 다만, 이명박은 등록금 반값 약속을 쌩깐다는 거다. 사교육비를 포함한 등록금은 대학생이거나 대학에 진학할 자식을 가진 부모들의 노후자금이다. 자식은 88만원 세대이고, 부모는 은퇴 후 8.8만원 세대가 된다.

2010-01-24

삼겹살로 변해 내 앞에 앉은 돼지가 꿈을 얘기합니다.
- 늙어 죽는 게 내 꿈이다.
인순이가 부르는 거위가 자기 꿈을 말합니다.
- 날자. 날자. 한 번만 날자꾸나.
몸싸움하는 여의도 1번지도 꿈이 있나 봅니다.
- 양이 질을 변화시킨다.
강진이 일어난 아이티가 내게 속삭입니다.
- 산 사람은 살아야지.

네 꿈은 뭐니?
대답합니다.
- 그게 뭐죠?

꿈을 꾸고 싶습니다.
꿈을 잃은 사람은 삼겹살보다도 미련이 없어 보입니다.

2010-01-22

내 마음의 자

1.
누구나 내 마음의 자는 가지고 있다. 가령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좋아하는 이에게 산울림 노래도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별로라는 대답을 듣고 평소 청춘을 즐겨 들었다고 성을 내지는 않았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으니까.

신입사원 시절. 선배가 노기스를 가져 오란다. 노기스? 그게 뭐냐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어 낭패한 표정을 지으니  선배가 말한다. 노기스는 버니어캘리퍼스를 부르는 말이라고. 노가다나 기름쟁이들은 그렇게 부른다고. 노기스라는 말을 모른다고 삶에 지장은 없지만 적어도 그 상황에서 배운대로 버니어캘리퍼스가 표준말이라고 대들었다면 너 잘났다는 뒷담화를 들었을 게다.

DJ는 빨갱이라는 시절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대통령을 찍은 사람이 DJ였다. 그때는 술상머리에서 DJ 얘기를 하면 눈총을 받고 심하면 집시법 위반으로 시비를 걸던 시절이었다.

내 마음의 자는 산울림이 부르던 청춘을 좋아했고, 버니어캘리퍼스가 표준말이고 DJ가 빨갱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눈을 치켜뜨며 대들지 않았다. 그건 네 마음의 자도 내 마음의 자만큼 중요하고, 내 마음의 자가 변하지 않는 만큼 네 마음의 자도 변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감대가 서로 같지는 않았지만 겹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정의나 진리 혹은 적어도 사실이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2.
사법고시와 검정고시는 같은 고시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지만 똑똑한 양반들만 합격하는 걸 보면 그 격이 다르긴 하나 보다. 그런 양반들이 PD수첩 일심 판결에 엄청 뿔이 났나 보다. 무죄 판결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검사 양반들이 그렇게까지 열을 내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열불 나는 정력의 반의반만 가지고 조두순 사건을 항소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버이 연합에 어떤 어버이들이 가입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법원장에게 계란을 던지고 가스통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더 웃긴 건 이를 지켜보던 경찰 나리들은 다 늦게 뒷북 수사에 착수하신다고 한다. 촛불을 든 꼬마에겐 들고 다니지도 못하게 했던 행태를 봐서는 너무 이른 대응(?)이라고 봐야 하나.

마음을 비우고 어여삐 생각해도 그 양반들은 어떤 잣대를 가졌는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기럭지가 달라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도대체 어떤 형상을 한 잣대를 가지고 열불을 내고, 뒷북을 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냥 순박하게 자질을 너무 하다 보니 닳아 없어졌거나 잃어버렸다고 하면 애교스럽기나 할 텐데.

3.
오늘 슬쩍 아무도 몰래 내 마음의 자를 꺼내 몇 자나 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본다. 엄청 짧다.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 조금이라도 자라길 바랬는데 오히려 길이가 서로 다른 자가 몇 개 더 나왔다. 언제 이리도 많은 자를 꼬불쳐 두었는지...ㅜㅜ

2010-01-19

인간은 갈대다

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갈대이다. 그런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부수는 데는 전우주가 무장하지 않아도 된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을 가지고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부순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보다 존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팡세 347)

인간은 나약한 갈대다. 인간은 갈대보다 더 나약해져야 우주가 깜짝 놀라는 존귀함을 보여준다. 인간은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나약해져 무한을 생각하고, 우주는 무한해서 무관심할 것 같지만 전혀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데 모든 인간이 에로틱하지 않아도 된다. 한순간이라도 사랑했다면 인간을 살리기에 충분하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은 행동하는 갈대다. 인간은 사랑하는 갈대다. 인간은 생각하는 만큼 행동한다. 인간은 행동하는 만큼 사랑한다. 인간은 사랑한 만큼 움직이는 갈대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고, 그만큼 움직이고 싶다. 인간은 사랑이 있어 존재하는 나약한 갈대다. (나무생각)

2010-01-16

아이티 그리고 용산

아이티에서 일어난 강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오듯 가난한 나라에 유독 자연재해가 잦은 지 안타깝다. 강추위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은 우리야 그렇다 쳐도 겨울이라는 계절이 없는 나라에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 아이티라는 나라가 유독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어디서 들어봤는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다가 지난 여름에 읽었던 「가난한 휴머니즘」을 아이티 대통령이었던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지었다는 게 뒤늦게 생각났다. 아이티는 나폴레옹이 지배하던 프랑스로부터 1804년 1월 1일 독립한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라고 한다.

1982년 돼지들이 병이 들었는데 다른 나라로 퍼지지는 걸 염려하여 미국이 압력을 가한(?) 국제기구는 새 돼지들을 주는 조건으로 아이티에 있던 토종 돼지들을 모조리 도살하도록 하였다. 2년 후 미국에서 새 돼지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미국 출신 돼지들은 워낙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놈들인지라 아이티 전국민의 80퍼센트가 식수난에 처해 있는데도 과장해서 말하면 생수를 먹여야 했다. 더군다나 당시 국민소득은 130달러인데 90달러나 되는 초호화 수입 사료를 쳐드셔야 했다. 부티나는 돼지들은 적응을 못 했고, 토종 돼지들은 이미 멸종한지라 더 먹고 살기 어려워져 지금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단다.

일련의 돼지 사태도 그렇고 턱밑에 쿠바가 있고, 쿠바 코밑에 아이티가 자리하고 있어 한때 점령하기도 했던(1915~1934) 미국은 아이티를 좌지우지했다. 신부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주도한 민주화 투쟁으로 물러난 뒤발리에는 미국이 뒤를 봐주었던 정권이었다. 아리스티드 신부는 뒤발리에가 물러나고 1990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쿠데타로 망명길에 올랐다. 2000년에 92퍼센트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미국이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안하무인 미국은 해병대를 시켜 그를 자택에서 붙잡아 외국으로 보냈다. 지진으로 국가가 마비된 아이티는 지금 남아공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그가 돌아오길 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무자비한 자유주의로 아이티 경제를 초토화시켜 더 가난하게 만들었고, 제 입맛에 맞는 정권을 앉혀 아이티를 쥐락펴락한다는 말씀이다. 강진이 일어나자 미국이 신속한 원조를 시작하고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이런 속사정이 있음이다. 아이티가 안고 있는 속내를 몰랐다면 발 빠르게 대처하는 미국의 참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고부터 연일 보도하는 아이티 참사를 볼 때마다 용산참사가 오버랩된다. 지구 반대편에서 각각 일어난 참사는 약하고 없는 나라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에게만 너무나 가혹해서 원망스럽다. 서양에 있는 미국과 아이티, 동양에 있는 한국과 용산. 아이티에서 발생한 지진은 천재(天災)이고 용산에서 일어난 참사는 인재(人災)라는 것 하나만 빼고는 너무나도 닮았다.

지금 우리는 너무 춥고, 아이티는 너무 슬프다. 아이티 강진 참사에 미국에 사는 아무개 영화배우 커플은 100만 달러를 기부했단다. 용산 참사를 일으킨 아무개 정부도 100만 달러를 지원한단다. 용산 참사를 일으키고도 나 몰라라 하던 정부 치고는 통 크다고 해야 하나. 같은 금액이지만 너무나 다르게 느껴진다.

2010-01-14

소탕 말고 소통을 하는 방법

  • 내가 생각하기에 토론은 서로의 '다름'을 드러내놓고 그것의 정당성을 객관적 근거를 통해 입증하는 것이며, 종국에는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15)
  • 토론이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치면서 합의를 이루거나 공통의 이해 기반을 넓혀가는 과정이다. (30)
  • 쌍방 간에 극단적으로 상대를 낙인찍으려고 한다. (94)
  • 점심 메뉴 정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토론에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취하던 사람들이 선거를 앞두고는 서로 지지하는 후보가 다르다는 이유로 칼부림까지 부린다. (116)
  • 사실 위에 정의를 세울 수는 있어도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도리는 없다. (131)
  • 이제는 성공신화를 바꿔야 한다. 성공신화를 대체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행복신화이다. (174)
  •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193)
  • 절대 다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들이다. (...) 다만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소통'이 아니라 상대편을 '소탕'하려는 소수의 횡포 앞에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225)
  • 중간에 서 있다는 것이 곧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 사안별로 시시비비를 가려내겠다는 뜻이다. (225)
  • 회색은 검은색, 흰색 둘 다를 가진 당당한 색깔이다. 경우에 따라 사안에 따라 검은색과 흰색의 장점만을 가려내고 적절히 섞어서 우리 공동체 전체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색하는 사람들이 회색인이다. (...) 이런 회색 지대가 넓어져야 한다. (...) 이들이 중심 세력이 되어야 한다. (227)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정관용/위즈덤하우스 20091126 256쪽 11000원

그럴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하는 토론 역시 방송용이었다. 방송용이라는 말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극과 극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잡아먹을 듯 양보 없는 토론을 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런 방송 토론이 모범 답안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서로 물어뜯다 결론 없이 끝나는 방송 토론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한다.

스스로 회색인이라 칭하며 불통의 현장을 중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소통이 아니라 소탕을 하려는 시대에 침묵하는 회색지대를 넓히자는 제안을 한다. 책은 술술 읽힐 정도로 쉽게 쓰여있는지라 책갈피 넘기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지만 그가 제공하는 실마리는 절대 가볍지 않다.

2010-01-13

폭설이 8000억 가치? 하늘에서 돈이 내렸나

1.
아이엠에프로 가뜩이나 어려워 마른 수건도 다시 짜라던 시절. 제안 사무국에 있는 양반과 술 한잔 찌끄리며 청승을 떨다 아주 재밌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양반 왈, 일 년에 나오는 제안 효과를 다 합치면 영업이익보다 많다고 하더군요. 제안자가 최초 입력한 유형효과를 합치니 그런 결과가 나왔다네요. 이익을 내도 이자 같은 금융비용 부담이 워낙 커서 빅딜설이 나돌던 시절인지라 깜놀했죠. 물론 제안심사를 하며 걸러지지만 상상 이상으로 제안 효과가 부풀려졌음을 알 수 있었죠. 마른 수건도 짜라는 강한 압박이 제안을 많이 하도록 했고, 그만큼 허수를 낳았다는 얘기입니다.

2.
지난 1·4 폭설의 경제적 가치가 8254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상청이 밝혔답니다. 분석 항목에는 가뭄피해나 산불 방지를 한 효과뿐만 아니라 스키장 운영비 절감이라는 것도 보입니다. 오보청을 넘어 구라청이라는 오명을 안은 기상청이 별걸 다 연구해서 발표하네요. 계량화가 가능한 항목만 적용하셨다는 토를 달면서 말입니다. 딱 하나만 되묻고 싶어 지네요. 죄송하지만 그날 점심때 짜장면을 배달 못 한 것과 족발집에서 야식 배달 못 한 것은 빼셨는지...

자꾸 그렇게 고상한 뻘짓을 하시니까 경제적 가치를 발표하는 순간 존재 가치가 떨어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