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28

planning이란?


planning을 일반적으로 '기획'이라고 한다. '계획'을 뜻하는 plan에 진행형인 ing가 덧붙어 있을 뿐이다. 사전적인 의미를 찾고자 해도 일반적인 해석뿐이고 실제 planning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새해 첫날 금연 목표를 세웠다 치자. 금연은 달성해야 할 과제(target)에 해당한다. 금연 목표를 달성하려고 운동을 한다거나 식이요법을 하거나 금연침을 맞는 행위는 plan의 시작이다.

금연 목표를 달성하도록 주기적인 check를 하며 부족한 부분은 원인을 파악해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정해진 시간에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planning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PDCA(Plan → Do → Check → Action) cycle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금연에 성공하는 것이 planning이다.

planning은 plan + ing다.

plan은 좋은 계획일 수도 있고 중간에 바뀔 수도 있지만 planning이 좋은 안(best plan)으로만 머물면 이미 실패한 것이 되고 만다. planning은 처음 계획한 것이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는지 살펴야 하고 진행이 부진한 것은 왜 그런지 원인을 알아내 계획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계획으로 대체함으로써 목적을 이루도록 끊임없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

planning의 출발점은 best plan이다. 완벽한(또는 완벽에 가까운) best plan은 20%의 노력과 시간으로 80%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20%의 효과를 얻으려면 80%의 노력(plan+ing)을 하여야 한다. 계획(best plan)과 변화(ing)를 반복하여 정해진 시간에 목표에 이르는 것이 planning이다. 기획이 실패하는 원인은 best plan만 있고 ing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planning은 best plan이나 perfect plan이 결코 아니다. planning은 성공과 실패만 있을 뿐이다.

2009-01-22

One day suddenly, Black House?


하얀 백악관에 검은 피부를 가진 오바마가 입주했습니다.
입주식을 보다가 대통령 선서를 하던 중 잠시 머뭇거리는 것을 봤습니다.
선서는 링컨 전 대통령의 1861년 취임식에 쓰였던 성경에 손을 얹고
대법원장이 선창 하면 당선자가 낭독하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대통령 취임 선서를 처음 주관해보는 젊은 로버츠 대법원장은
'성실히(faithfully)'라는 단어의 순서를 뒤바꿔 선창 했다는군요.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 출신인 엘리트 변호사 오바마는
대법원장의 실수를 곧바로 알아차리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대법원장이 뒤바꾼 어순 그대로 선서문을 따라 읊었답니다.

로버츠는 부시 전 대통령의 지명으로 대법원장에 오른 보수 성향의 인물로
오바마는 상원 인준 당시 반대표를 행사했었던 인연(?)이 있다네요.
오바마는 대통령 취임 후 첫 점심을 로버츠 대법원장과 함께 했는데
이 자리에서 로버츠는 오바마에게 실수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고,
오바마는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고 하더군요.

비록 입주식 하는 날의 주인공이 대통령이기는 하지만
선서는 엄연히 사법부 수장인 연방대법원장이 주관하는 자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전합니다.
그제야 오바마가 선서를 하며 잠시 머뭇거렸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가 입주했다고 White House를 느닷없이 Black House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만들도록 놔둘 그네들이 아니기에 오바마를 선택했겠지요.

군복을 입은 이가 푸른 집에 들어가면 전 국민에게 군복을 입히려 하고
말 잘하는 이가 들어가면 조동이로 조중동만 나불대고
삽질을 좋아하는 이가 입주하면 전 국토를 삽질하려는
플로리다 주만한 나라에 사는 동양의 어떤 찌질이가
참 부러워하는 해프닝이었습니다.

2009-01-21

왜 남의 나라 대통령 취임식을 보며 들떴을까?


왜 새벽에 남의 나라 대통령 취임식을 보며 주책 맞게 들떴을까?

옷 잘 입고 몸짱에다 말발이 좋은 젊은 양반이라서 그럴까?
엄청 부러워하는 만큼 측은하게 4년을 더 보내야 하기 때문일까?
적어도 무식하게 무대뽀로 물대포를 쏘지는 않을 성싶어서일까?
머릿속에 달랑 삽자루 하나만 있어 보이지는 않아서일까?
검은 피부에서 장밋빛 희망이 보이기 때문일까?
환호하는 그네들이 보낸 지난 4년 동안의 심정이
4년이나 더 울화통을 삭힐 우리와 동병상련이었을까?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왕 목사(Martin Luther King, Jr.)는 꿈을 말했고
2009년 1월 20일, 왕이 된 한국의 장로(Mad Build King)는 꿈을 불살랐다.

2009년 1월 20일, 미국의 아무개 씨는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자고 했고
2009년 1월 20일, 한국의 아무개 씨는 한 시대를 무자비하게 철거했다.

2009년 1월 20일, 미국의 아무개 씨는 대통령이 되는 첫날이었고
2009년 1월 20일, 한국의 아무개 씨는 폐기되기 1497일 전이었다.

지금 이 순간, 독수리 여권을 가진 사람이 무지 부럽다.

2009-01-17

알고 보면 더 재밌을 것 같은 천추태후


대왕 세종을 끝으로 주말 사극이 없어졌던지라 리모컨과 함께 춤을 추던 내게는 무료한 주말 저녁이었다. 더군다나 대왕 세종을 시작하던 초창기에는 들여다보곤 했지만 대조영만큼 칼싸움을 하는 볼거리가 없던지라 본방 사수를 하지 않다 이내 시청하는 것을 단념했었다.
연초에 새롭게 천추태후가 방영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요즘 사극의 대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1, 2회는 칼싸움으로 눈길을 끌더니 3, 4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역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는지라 이야기가 늘어지고 칼싸움하는 횟수가 줄어들면 닥본사 할 자신이 없어지겠지만 조금 더 참아주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고려 시대는 근친혼이 성했던지라 천추태후를 보면서 그네들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여 예전에 사놨던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박영규, 들녘 1996)을 빼들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짜집기 하였음을 밝혀둔다.

1. 칠대실록

고려 건국 태조 왕건 (877 ~ 943)

재위기간 : 918. 6 ~ 943. 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 9녀

통일국가를 이룬 왕건이지만 고려의 초기 형태는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쳤다.

왕권안정책의 하나로 실시한 혼인정책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왕건에게는 좋은 안전장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혼인정책은 그가 죽은 뒤 왕권 다툼의 각축장으로 몰고 가게 된다.

주름살 왕 제2대 혜종 (912 ~ 945)
재위기간 : 943. 5 ~ 945. 9 (2년 4개월) 부인 4명, 자녀 2남 3녀

태조 왕건은 부인이 29명이나 됐고, 자녀는 25남 9녀를 두었다. 신혜왕후 유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인 오씨로부터 첫아들을 얻었고 그가 바로 혜종(惠宗)이다.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오씨를 만났다. 이때 왕건은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오씨가 이것을 즉시 흡수하여 임신을 하였다. 열 달 후 아이를 낳았더니 이상하게도 아이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혜종의 왕위 승계를 반대하던 무리들이 고의로 퍼뜨린 이야기겠지만 이런 출생담으로 인해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짧은 재위기간 동안 주름살 펼 날 없이 지냈다. 왕권이 위축되어 침실을 옮겨가며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혜종의 죽음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서경천도 계획 제3대 정종 (923 ~ 949)
재위기간 : 945. 9 ~ 949. 3 (3년 6개월) 부인 3명, 자녀 1남 1녀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혜종은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서경파의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이가 제3대 왕 정종(定宗)이다. 태조 왕건의 3남(태자 태가 그의 형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죽었음)이었지만 강력한 호족세력인 충주 유씨가 그의 외가였기에 가능했다. 너무 많은 피를 보고 즉위한 정종은 향수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서경 천도를 계획했던 그가 죽자 백성들은 부역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환호했다고 한다.


과감한 개혁과 호족들의 수난 제4대 광종 (925 ~ 975)
재위기간 : 949. 3 ~ 975. 5 (26년 2개월) 부인 2명, 자녀 2남 3녀

태조의 4남이었던 광종(光宗)은 26년 2개월 동안 재위하면서 과감한 개혁작업을 했다. 즉위 이후 7년간 모색기를 가지다 이후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을 숙청하였다. 그는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하였고, 후주 세종의 신하 쌍기를 끌어들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도입했다. 광종의 개혁정책은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재위 26년 2개월 만인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호족 공신들의 재등장과 화합정책 제5대 경종 (955 ~ 981)
재위기간 : 975. 5 ~ 981. 7 (6년 2개월) 부인 5명, 자녀 1남

광종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왕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도모하는 호족들이 생겨났고, 그 때문에 혜종의 아들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 경춘군이 역모에 휘말려 죽었다. 호족들이 광종을 제거하고 태자 주(경종)을 옹위하려 한다는 의심 어린 눈초리로 경종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다행히 광종에겐 태자 이외에 다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광종의 공포정치가 끝날 무렵 살아남은 호족 공신은 겨우 40여 명이었다. 경종은 호족들을 달래고 화합정치를 모색하고자 복수법을 허락하였고, 이 때문에 곳곳에서 복수전이 벌어졌다. 복수전은 약 1년간 지속됐는데, 복수법을 빌미로 왕실의 어른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경종은 곧 복수법을 금하였다. 경종은 전시과(田柴科)를 마련하여 토지제도의 혁신적인 변환을 꾀하였고, 공신세력을 끌어안고 동시에 광종대에 성장한 신진 관료들로 하여금 그들을 견제하게 하는 양면책을 구사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왕권강화책을 시도하던 경종은 쫓겨났던 최지몽을 등용하였다. 최지몽은 조정의 실세로 등장한 후 왕승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여 경종으로 하여금 집권 후 처음으로 역모사건을 경험케 한다. 최지몽이 왕승에게 역모 혐의를 씌웠다는 것은 호족들이 다시금 왕권에 도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사건 이후 정치에 염증을 느낀 경종은 정사를 게을리하고 여색과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는 등 방만한 생활로 일관하다 재위 기간 6년 2개월, 27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경종은 부인을 5명 뒀는데 제3비인 헌애왕후 황보씨는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인 대종의 딸이며 후에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불렀다. 제4비인 헌정왕후 황보씨는 친동생이기도 하다.

유학정치이념의 실현자 제6대 성종 (960 ~ 997)
재위기간 : 981. 7 ~ 997. 10 (16년 3개월) 부인 3명, 자녀 2녀

981년 7월 죽음이 임박해진 경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6대 왕에 오른 이가 성종(成宗)이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성종은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인 7남 대종 욱(旭)과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 소생 선의왕후 유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둘째 아들인 치(治)가 황제로 즉위한 까닭은 맏아들인 효덕태자가 광종의 사위인 동시에 경종과는 사촌 겸 처남매부 사이였기 때문이었고,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 사이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목종이 겨우 두 살이었기 때문이다.

광종 이후 형성된 유교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성종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즉위와 동시에 팔관회를 폐지하는 등 숭유억불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새로운 통치체제를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3성 6부제 즉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3성과 이, 병, 호, 형, 예, 공부 등의 6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행정조직 개편에 의한 중앙집권화를 완성한다.

유학의 진흥과 교육개혁을 통한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는 동안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며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가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고려 조정은 신라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승계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며 군사적 대응을 결정한다. 이에 거란은 성종 13년(993년 10월)에 소손녕을 대장군으로 삼아 침략한다.
성종은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에 임명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진을 쳤다. 서희는 광종 11년 18세로 갑과에 급제한 후 십여 년간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단절되었던 송과의 외교관계를 회복시키면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았다. 소손녕은 80만 거란군이 도착했음을 알리며 힘을 과시했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항복하고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넘겨주자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성종 역시 이 의견을 받아들여 서경 창고에 있던 쌀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라고 명했다. 그런 다음에도 쌀이 남자 적의 군용으로 쓰일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했다. 이에 서희가 대세를 따르지 않고 강력하게 반대를 하자 쌀을 대동강에 버리라는 명령은 거둬졌다.

소손녕의 항복을 종용하는 서한에 대해 고려가 답변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안융진을 공격했던 거란군이 패하자 소손녕은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항복을 종용하는 서한을 보내 고려에 면대를 요청해왔다. 적진으로 간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6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변까지 확대되고 고려와 거진 사이에 있던 여진의 세력은 더욱 위축이 된다.

성종대엔 행정조직의 정비를 통한 중앙집권체제제를 확립하고, 유교를 정착시켜 교육제도의 변혁을 꾀했으며, 거란과의 외교적 성과로 강동 6주를 얻어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22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고려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노력했던 성종은 997년 10월 병이 위독해지자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 아들인 자신의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향수는 38세요, 재위기간은 16년 3개월이었다.>

나약한 동성연애자 제7대 목종 (980 ~ 1009)
재위기간 : 997. 10 ~ 1009. 2 (11년 4개월) 부인 1명, 자녀 없음

아들이 없던 성종은 경종의 맏아들이었던 송(訟)을 궁궐에서 양육하여 990년에 개령군에 봉했다. 임종을 앞둔 성종의 내선으로 왕위에 오르니 제7대 왕 목종(穆宗)이다. 18세의 어린 목종이 집권하자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빌미로 친모 헌애왕후가 섭정을 실시한다. 정권을 차지한 헌애왕후는 귀양가 있던 자신의 정부 김치양을 불러들인다.

김치양이 권력을 독점하자 목종은 그를 내쫓으려고 하지만 헌애왕후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다. 왕권을 완전히 빼앗긴 목종은 절망한 나머지 정사를 소홀히 하고 엉뚱하게도 유행간이라는 인물과 동성연애를 즐기기 시작한다. 왕을 조정하게 된 유행간은 오만방자한 행동을 일삼았고, 신하들은 그를 왕처럼 떠받들었다.

겁이 많던 목종이 병으로 눕자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세자에 책봉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자신의 이종 조카인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임종이 가까웠음을 안 목종은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정하고자 하였다. 목종은 대량원군을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강조는 왕의 명령이 헌애왕후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려고 군사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강조는 서경을 떠날 때 목종은 이미 김치양 일파에 의해 살해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도 평주에 도작해서야 왕이 살았다는 것을 알고 후회했지만 군사를 이끌고 와 반역으로 몰릴 것을 염려하여 목종을 폐립할 것을 결정한다.

병사들이 궁 안으로 밀려들자 목종은 법왕사로 피했다. 강조는 뒷일을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 사약을 먹도록 강요했는데, 목종이 이를 거부하자 강조의 수하들이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목종은 결국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1009년 2월에 일어난 강조의 역모사건은 현종 즉위 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2.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제8대 현종 (992 ~ 1031)
재위기간 : 1009. 2 ~ 1031. 5 (22년 3개월) 부인 13명, 자녀 5남 8녀

경종 이후 고려왕실은 왕위를 승계할 왕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왕족 중에 근친을 통해 아들을 낳은 사람은 안종 왕욱뿐이었다. 그의 아들 왕순은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와의 불륜관계에서 태어났다. 왕순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대종 왕욱의 딸이며, 아버지 안종 욱은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안종은 헌정왕후의 삼촌이 된다. 그리고 헌정왕후는 성종과 남매지간이며 헌애왕후(천추태후)의 동생이기도 하다.

왕위를 노리던 헌애왕후는 누차에 걸쳐 왕순의 목숨을 노렸지만 다행히 살아남아 강조에 의해 제8대 현종(顯宗)이 된다. 하지만 현종은 즉위 초부터 거란이 목종의 폐위를 구실로 침략했기 때문에 전란에 휘말렸다. 주변국과의 잇따른 전쟁을 겪으면서 고려는 국방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된다.

993년 80만 대군으로 제1차 침입을 시도하다 서희와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난 거란은 1010년과 1018년에 2, 3차 침입을 강행한다. 1010년 10월 거란왕은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로 진군했다. 통주에 주둔하던 강조는 병력을 이끌고 응전하였지만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거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고려는 반격을 하였지만 역부족으로 현종은 나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고려군과의 전면전에서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고려군의 게릴라식 공략으로 거란군은 퇴각하였다.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강동의 여섯 성을 요구하며 침략을 하던 중 1018년 12월 소배압(소손년의 형)이 10만을 이끌고 침략을 감행했다. 강감찬이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압박을 가해오자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소배압은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에 의해 구주에서 몰살당하고 말았다. 1019년 2월 초하룻날 벌어진 이 전투가 유명한 구주(龜州)대첩이다.

사회가 안정되자 현종은 전란중에 소실된 사초를 복원하기 위해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 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는 한편, 6천여 권의 대장경을 편찬토록 하였다. 이때 편찬된 실록이 고려 최초의 실록이며, 이때 편찬된 대장경이 후에 원나라 침입중에 만들어지는 팔만대장경의 모태가 된다. '칠대실록' 편찬 이후 고려는 각 왕대마다 실록을 편찬하는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현종은 비록 많은 수난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발전시켜 고려의 위상을 대외에 과시하게 하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너무 많은 고초를 겪은 탓인지 재위 22년 만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현종은 차례로 왕위에 오르는 세 아들(제9대 덕종, 제10대 정종, 제11대 문종) 시대의 안정과 평화를 다지며 고려의 황금기를 여는 디딤돌이 되었다.

3. 정사(政事)와 정사(情事)를 주무른 여인 - 역사 속 천추태후 (964 ~ 1029)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인 대종 욱의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태조와 정덕왕후 유씨 사이에 태어난 선의왕후다. 어머니 성인 유씨를 따르지 않고 황보씨 성을 따른 것은 친할머니 신정왕후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경종은 헌애왕후 친동생 헌정왕후도 왕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두 자매를 왕비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황주 황보씨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말해준다.

헌애왕후는 997년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한다. 이때 그녀는 천추전에 거처하였으며 스스로를 천추태후라고 부르기도 했다. 섭정을 하던 헌애왕후는 정부 김치양을 불러들인다. 김치양은 성종대에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다가 발각되어 귀양중에 있던 상태였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헌애왕후는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른다. 김치양과는 버젓이 부부행세를 하며 간통을 하고 아이까지 출산한다. 이 아들로 하여금 목종의 대를 잇게 하려고 했다. 헌애왕후는 대량원군(현종)을 죽이기 위해 몇 번이나 자객을 보내고 독살을 계획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다가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헌애왕후의 인척들을 귀양보낼 때 그녀도 황주로 내쫓긴다. 그곳에서 21년간 머물다가 1029년 숭덕궁에서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4. 헌정왕후 황보씨 (? ~ 992)와 안종 욱 (? ~ 997)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는 헌애왕후 황보씨의 친동생이다. 왕비로 책봉된 후 후사가 없었으며 경종이 죽은 다음에는 사가에 머물렀다. 그녀의 사가는 왕륜사 남쪽에 있었는데 그 근처에 신성왕후 김씨 소생인 왕욱의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왕래를 하였고, 마침내 정을 통하여 임신을 하였다. 이 사실은 한동안 집안에서 비밀에 부쳐지다가 발각되어 성종은 안종 욱을 귀양보냈으며, 그가 귀양가던 날에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 죽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왕순이다.

비록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였지만, 왕순은 태조의 손자이자 성종 자신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 아이가 두 살이 되자 아버지를 찾으므로 성종은 아버지 왕욱에게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 왕욱이 병으로 죽자 고아가 된 왕순은 개경으로 돌아온다. 자식이 없던 목종은 그를 대량원군에 봉했다. 그러나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음모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다 목종을 폐위한 강조에 의하여 고려 제8대 현종이 된다.

짜집기를 마치며

닥치고 보자

고려 시대 왕실의 근친혼을 보고 족보가 어떻다며 따지지 말자. 근친혼은 신라 왕족의 풍습이었고, 고려 왕조를 세우며 왕권을 위협하는 호족들과 공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역사 속 왕건의 부인이 29명이 있었고 그 후손들은 촌수를 따지기에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태조가 자식들을 형제끼리 결혼시킨 것은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만약 왕이 족외혼을 했을 경우 왕권이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족내혼은 순수 혈통으로 왕위를 잇는다는 의미 이외에도 왕의 위상이 격상되었음을 상징한다. 태조가 혜종이나 정종의 배필을 자신의 딸들 중에서 택하지 못했던 것은 왕권이 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이 될 가능성이 컸던 혜종과 정종의 결혼은 호족들과의 제휴를 위하여 정략결혼을 한 것이다.

떠들지 말자

강감찬과 함께 천추태후는 거란의 대군을 물리친다고 하지만 제1차 침입은 성종 시절에 있었고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으며 끝난다. 이어지는 두 차례의 침입은 천추태후가 귀양가 있던 현종 때 일어난 일이다.

또한 헌정왕후 황보씨는 경종이 죽은 후 사가에서 안종 욱을 만나 정분을 쌓고 현종을 낳게 된다. 경종에게 시집가기 전에 안종 욱을 만났을 확률이 낮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보자.

사극 천추태후가 역사적 사실과 같네 다르네 떠들지 말자. "이 글은 소설이다?"에서도 언급했지만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핏대를 올리지 않았으면 한다. 테레비에 나오는 것 중에 사실인 것은 세 가지밖에 없다. 동물의 왕국, 스포츠 중계 그리고 전쟁. 이 세 가지 빼고는 모두 픽션이다.

그저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에 감탄하며 재미있게 닥본사 하자.

2009-01-13

칼바람과 칼국수

호랑이 불알은 동지부터 얼었다가 입춘에 녹는다고 했지만 날씨가 겁나게 춥습니다. 콧물이 슬쩍 나오다가도 화들짝 놀라며 도로 기어들어 가는 날씨입니다. 어릴 적 생각을 하면 그리 놀랄 정도로 추운 날씨는 아닌데 내가 뀐 방귀조차 지구 온난화에 일조한 덕분에 삼한사온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점점 따뜻한 겨울을 지내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날 부는 바람을 칼바람이라고 하죠. 칼로 도려내듯이 매섭고 독하다고 그렇게 부르죠. 칼바람 부는 날은 멸치국물로 맛을 낸 따뜻한 칼국수가 생각납니다. 요즘이야 온갖 해물이 들어가 육수 맛은 더 풍족해졌지만 먹거리 없던 시절, 밀가루 반죽을 해서 홍두깨로 넓게 밀고 부엌칼로 숭숭 썰어 멸치와 감자를 넣고 끓여 주시던 어머니표 손맛 칼국수가 그리워집니다. 반죽을 썰다 남은 꽁다리를 화덕에 구워 먹으면 어쩜 그리 맛있었는지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칼국수를 좋아합니다. 한여름에도 가끔 허름한 단골 칼국수집에 가곤 한답니다. 청양고추와 다대기를 풀고 얼큰하게 한 그릇을 비우면 오뉴월에도 시원 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칼국수만큼 엄동설한에는 따뜻하게 몸을 데워주고 삼복더위를 시원하게 느끼게 해주는 음식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칼국수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칼국수라는 말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칼국수라는 말을 쓰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는군요.

칼국수 주문을 하면서 "칼은 빼고 주세요"라든지 칼국수가 나오면 "어라. 칼이 안 들었네!"라는 농담을 한 번이라도 해보지 않은 분은 없을 줄 압니다. 외국인들이 칼국수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농담으로 했지만 정말 칼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칼바람 맞았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디에 칼 맞았느냐며 화들짝 놀라면서 911에 전화를 할 테니 말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칼바람, 칼국수라는 말에 놀란 외국인을 안심시키고 추락한 신인도를 만회하는데 20억 원(단위가 원인지 달러인지는 모르겠음)이나 썼다고 얼핏 들은 것도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허위사실 유포죄라 함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라고 하니 특히 전화로 칼국수를 주문하거나 예약하면 안 된다는 말씀 되시겠다. 더군다나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허위사실 자체를 처벌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하니 엄청나게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어린쥐를 좋아하는 나라인지라 이참에 칼국수도 handmade knife-cut noodles로 불러야 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칼퇴근해서 칼바람 맞고 싸돌아 다니지 마시고 냉큼 집으로 달려가 뜨끈한 칼국수 한 대접씩 드시기 바랍니다. 조금 모자란다 싶으면 꽁보리밥을 말아 먹으면 안성맞춤이죠. 어쩌면 칼바람 부는 요즘에 먹는 칼국수가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부르며 젓가락질하는 최후의 칼국수 만찬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2009-01-12

소통에 처박은 우리 동네 이발소

오늘 새해 들어 처음 대굴빡을 깎았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이발소가 달랑 하나 있답니다. 이발소 주인은 자수성가한 양반입니다. 젊었을 때는 아버지가 파는 침대가 싫다며 데모도 했다는군요. 그 바람에 이발소 시다로 출발해서 손님 머리도 감겨주며 기술을 익혀 작년 초에 지금 이발소 주인이 됐습죠.

이발소 주인 아버지는 침대 장사를 했습니다. 간판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유명했답니다. 손님이 오면 침대에 눕혀보고 침대보다 다리가 길면 침대 길이에 맞춰 다리를 자르고, 짧으면 다리를 늘여서 언제나 똑같은 침대를 팔았습니다. 그 시절은 어느 집이나 같은 크기의 침대에서 잠을 잤었습니다. 영업이 너무 잘되던 어느 날 이발소 주인 아버지는 시바스 리갈을 마시며 회식을 하다 집사가 던진 포크에 맞아 죽었더랬지요.

개업하자마자 이발소 주인은 미국에 갔다 오더니 느닷없이 30개월이 지난 미제 뽀마드 기름을 가져다 쓴다고 했습니다. 미제 뽀마드 기름이 간간이 사람을 잡는다는 소문이 있었고, 당연히 동네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냐며 촛불을 들고 이발소 앞에서 반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주민들 수가 점점 늘어나자 이발소 주인은 두 번이나 사과를 했습니다. 이발소 간판도 『소통에 처박은 이발소』로 바꿔달고 면도사며 일하던 시다 몇 명을 내보내기도 했었죠.

동네에 하나밖에 없어 기다리는 손님이 많은지라 혼자서 무리하지 말고 이발사를 몇 더 두라고 해도 이발소 주인은 들은 체도 안 하고 혼자서 머리를 깎는 고집불통이기도 합니다. 머리도 일명 「사발머리」라고 해서 의자에 앉으면 짬뽕 그릇을 대굴빡에 씌워놓고 삐져나온 머리카락만 가위로 싹둑싹둑 깎아 줍니다. 개업한 쥐 일 년도 안됐는데 동네 사람 머리 모양이 비스무리해져 갑니다.

머리 깎는 품새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별 수 없이 이발소에 갔습니다. 웬 더벅머리 청년이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더군요. 순서를 기다리며 옆 사람에게 누군지 물었습니다. 한 번도 머리를 깎지 않고 더벅머리를 한 채 이발소 앞을 몇 번 지나갔었다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발소 주인은 그 청년 머리채를 휘어잡고 의자에 강제로 앉혔다고 합니다. 기다리는 손님들 머리를 다 깎아 주고 나서 점방문 내리면 사발머리로 만든다며 벼르고 있다고 그러네요.

사발머리가 맘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웃 동네로 갈 처지도 아닌지라 오늘 울며 겨자 먹기로 대굴빡을 깎고 왔습니다. 사발머리가 된 대굴빡을 보면서 씩씩대고 있지만 어쩔 수 있나요. 다시 머리가 자라길 기다려야지요.

집에 와 저녁을 먹고 껌 씹는 소리를 떠들다 그 청년 얘기를 했더니 이웃 동네까지 벌써 소문이 좍 퍼졌다고 그러더라고요. 머리를 안 깎겠다는 청년을 굳이 사발머리로 만들겠다며
붙잡아 놓은 이발소 주인 심보를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동네 창피하게스리.

자꾸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소통에 처박은 이발소』가 겹치면서 끔찍한 상상이 떠오르는데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요. 이발소가 너무 잘돼 침대 장사까지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합니다. 순례길에 오른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돌아오시면 물어볼 참입니다.

그나저나 날씨도 추운데 공연히 대굴빡을 깎았나 봅니다. 머릿속에 찬바람이 휑하니 부는 게 박제처럼 얼어붙는 느낌입니다. 젠장.

2009-01-10

과거의 리더십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마라

[출처] 이코노미스트/임성은 기자 (20081216)

세계적인 리더십 컨설턴트이자 경영 석학인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 박사가 ‘위기의 시대에 빛나는 위대한(great)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했다. 12월 5일 서울 리츠칼튼호텔에서 한국리더십센터 주최로 열린 CEO 조찬회에서다. 이번 방한은 LG전자 프랭클린 플래너폰의 국내 출시를 기념해 한국리더십센터와 공동 초청으로 이뤄졌다. 전 세계가 직면한 경제 침체에서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일까. 코비 박사의 강의 현장을 취재했다.

한국리더십센터 주최 CEO 조찬회에서 만난 스티븐 코비 박사는 77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력적이었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전 세계 80개국에서 2500만 부 이상 팔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이자, 경영 리더십 분야 권위자다. 그는 수년간 ‘급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부터 하라’는 한결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때에 맞는 강의로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 정부의 리더십 계발에도 수차례 자문해 왔던 그는 오바마 정권에도 이날 조찬회 강연 내용을 조언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정권은 물론이고, 현재 전 세계가 직면한 경기침체 상황에 대해 코비 박사의 제안은 명확했다. 그는 금융위기가 낳은 경기침체는 “새로운 도전”이라며 “새로운 도전에는 새로운 방식의 응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어떤 정치인은 과거의 리더십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코비 박사는 “리더십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주문했다. 현재의 경기침체 상황은 산업경제 시대의 그것과 달라 지식경제 시대를 이해해야 풀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리더십은 어떠해야 하는가. 코비 박사는 먼저 “직원 인재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라”고 말했다. 그는 한 CEO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회사에서 비용입니다. 그러나 제가 들고 있는 마이크는 자산이라고 부르지요.” 누구나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우리의 회계 양식에 따르면 분명 인재는 비용이다.

“현재 산업경제에서 지식경제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 같지만 아직 많은 조직, 리더, 시스템은 사람이 비용이고 자본과 기계는 자산인 산업경제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과거의 리더십은 실패를 낳는다. 실패의 대표적인 예는 조직의 문제가 무엇인지 조직원 사이에서 공유가 안 된다는 점이다.

설사 문제가 공유됐다 하더라도 해결을 위해서 팀이 하나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는 모든 직장인이 느꼈을 만한 조직의 문제점을 다음 하나의 질문으로 표현했다. “여러분, 자신이 생각하는 북쪽을 가리켜 보십시오.”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이쪽저쪽 서로 다른 방향들을 가리켰다.

“세계 어디 가든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질문을 바꿔봅시다. 우리 회사, 조직 내에서 제1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같은 회사 직원 모두가 한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까?”

리더십의 패러다임 바꿔라

장내가 잠시 잠잠해졌다. 문제 인식도 모두가 공유하지 못했는데 문제가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코비 박사는 또 모두가 느끼고 있지만 아무도 해결 못했던 문제 하나를 지적했다.

“사람을 비용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리더들은 직원이 좀 더 적게 받고 많이 생산하길 바랍니다. 고효율을 요구하는 것이죠. 그러나 한편 직원들은 이런 생각도 합니다. ‘지금 내 직장은 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엔 모자란 곳이야.’ 리더는 인재가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라고 압박하는데 직원은 충분히 발휘할 만한 환경이 아니라며 불평한다면 모순된 상황이죠.”

코비 박사가 말한 두 가지 문제점은 언뜻 긴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 듯하지만 성공하는 조직, 초일류 기업이 되기 위해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조직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나 직원들이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환경을 만드는 것은 누구나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일이다.

그러나 산업시대의 리더십은 종종 중요한 일보다는 발등에 떨어진 일부터 하도록 조직을 이끈다. 코비 박사가 말하는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자’는 성공 원칙과는 정반대다. 그가 말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십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직원은 지렛대가 높은 자산입니다. 당근과 채찍이 아닌 내부 동력을 작용하게 하십시오. 잘난 상사 한 명이 조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잘 쌓아놓은 문화가 있어 조직이 굴러가게끔 하십시오. 다른 말로 하자면 직원을 섬기는 ‘서번트(하인) 리더십’을 실천하십시오.”

물론 시간도 오래 걸리고 당장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 두고 보면 나중엔 사장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돌아가는 지속가능한 조직이 될 것이라는 게 코비 박사의 설명이다. 이를 위해선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연마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비 박사는 “마법의 지팡이를 사용해보라”고 말했다.

그가 인디언 부족 추장들을 교육할 때 썼던 것으로, 한 명이 지팡이를 주면서 의사를 전달하면 상대방이 그 의견을 만족스럽게 이해할 때까지 아무 의견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둘은 ‘더 좋은 해결방안’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 보면 오해는 줄이고 상대방을 이해하며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코비 박사는 자신의 멘토인 피터 드러커의 말을 인용해 “성공하는 사람은 기회를 잡고 실패하는 사람은 위기에 집착한다”고 강조하며 강연을 정리했다.

「어떤 정치인은 과거의 리더십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음주운전은 법으로 금하고 있다. 술 마시고 운전하다 사고가 났을 때 음주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주 운전으로 말미암아 피해자가 나오는 걸 예방하고자 그러는 것이라 생각된다. 속된 말로 술 처먹고 너 혼자 비명횡사하는 건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네가 쳐 먹은 술 때문에 무고한 생명이 이유 없이 상하면 안 된다는 뜻이리라.

나의 리더십은 고작 해야 한 평 밖에 그 영향력이 없지만, 과거의 리더십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리더의 영향력은 음주 운전을 하다 사고 친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준다. 현재만 죽이면 천만다행이지만 미래까지 대량학살을 하며 암울한 과거로 쑤셔넣기 때문이다. 술 처먹고 역주행하는 차보다 더 무서운 것이 초지일관 우직하게 역주행하는 리더를 만나는 것이다.

더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리콜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2009-01-06

워룸과 멍박

어쩌다 고스톱을 칠 기회가 있으면 첫판은 선잡기 연습게임을 하자고 한다. 여섯 장 깔고 일곱 장씩 쥐고 앉아 패가 다 떨어질 때까지 쳐서 점수가 제일 높은 사람이 선을 잡는 것이다. 물론 판돈도 없다. 전국 팔도에 있는 동네마다 고스톱 룰이 조금씩 달라서 선잡기 게임을 하면서 공통의 룰을 정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선잡기 게임을 하다 보면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날의 고스톱 룰이 얼추 정해진다. 그래서 판이 끝날 때까지 점수를 세는데 별 다툼이 없다. 거액의 판돈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 점 백에 맥시멈 만 원짜리를 치는 심심풀이지만 공통의 룰 없이 시작하게 되면 어느 순간 점수를 세다 이견이 생겨 찝찝하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종종 있곤 해서 그렇다.

동네마다 색다른 룰 중에 '한 번 독박은 영원한 독박'이라는 것이 있다. 대개 독박이 될 패를 내려놓고 한 바퀴 도는 동안 점수가 나지 않으면 해제됐다고 하는데 어느 지방은 내려놓은 패로 말미암아 점수가 나게 되면 점수가 못난 두 사람이 들고 있는 패를 검사해서 독박 유무를 판정하기도 한다. 그런 자리에서 한 번 독박을 쓰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잘 돌아가는 꼴통도 아닌데 신중해져서 어느새 경로당 화투를 치게 된다.

피박, 광박, 멍박이 고스톱 삼대 박이라고 하지만 멍박이 나오기는 참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멍텅구리라고 하는 열끝자리 패 9장 중 7장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멍박이 나오는 판은 셋 중 두 사람이 지지리도 못 쳐서 점수가 크게 나곤 한다.

어제 정부는 비상경제대책회의를 만든다고 한다. 60평 되는 청와대 지하 벙커를 전시에 준하는 비상상황실로 만들어 경제위기를 극복한다는 취지다. 일명 한국판 워룸이란다. 룸이라고 하면 밀폐되고 은밀한 것을 상상하던 터에 지하 벙커에 만든다고 하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곳에서 국민이라는 판돈을 가지고 그들만의 고스톱만 치는 건 아닌지 정말 우려되는 걸 숨길 수 없다. 피박, 광박은 나름대로 선전하면 뒤집어쓰지는 않겠지만 일반 고스톱 판에서 드물게 나오는 멍박(MB)이 한 판 끝날 때마다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워룸에 입장한 사람들이야 어차피 제 돈 내고 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눈먼 판돈을 가지고 치게 생겼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깔렸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더군다나 워룸의 주인이 멍박과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고스톱 룰 마저 바꾸지 않을까 염려된다. 가령 멍박이 나오면 점수를 두 배가 아니라 747배로 한다든지, 삽질을 747번을 더 한다든지 할까 두렵다. 그것을 예방하는 방법은 경제 좀 안다는 타짜들을 죄다 불러다 놓고 선잡기 한 판을 하면서 공통된 룰을 만들고 정정당당한 리그전을 하면 될 텐데 멍박 좋아하는 주인장이 그렇게 할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드니 갑갑할 뿐이다.

그저 존두환 고스톱, 영삼이 고스톱, DJ 고스톱, 놈현 고스톱 뒤를 잇는 멍박 고스톱이 나오지 않기를 두 손 모아 바랄 뿐이다.

2009-01-05

오늘 어느 발부터 양말을 신었나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집을 나오려고 양말을 신었습니다.
혹시 어느 발부터 양말을 신었는지 기억하시나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어느 발부터 양말을 벗었나요?
양말을 혼자 신으며 수많은 날을 반복해 온 일인데도
퍼뜩 생각이 나지 않으시지요.
왼발 아니면 오른발, 둘 중 하나겠지요.
아, 맨발로 돌아다니셨다고요.
아이고. 몰라뵀습니다. 청춘이시네요.

우리는 늘 해오던 일인데도 관심이 없으면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비슷합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변함없이.

눈에 불꽃이 튀는 사람을 만나 시작한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무덤덤해집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정작 내가 아쉬울 때만 생각이 납니다.

청춘의 피가 끓었던 그 시절 친구들은
무소식이 희소식이 된 지 오래됐습니다.

고마웠던 사람은 눈 깜박할 사이에 잊어버리고
미워하는 사람은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생생할 것 같습니다.

해가 바뀌었다고 불량종자가 느닷없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되지는 않겠지만
하루에 한 번이라도
아침에 양말을 신을 때나
저녁에 양말을 벗을 때
고마운 이들을 생각하겠습니다.
억지로라도...

오늘 나는 어느 발부터 양말을 신었을까?
오늘 나는 당신이 있어 참 고맙습니다.

2009-01-0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8년은 무자년(戊子年) 쥐띠 해였습니다.
무자비했고 그쥐 같은 한 해였습니다.

올해는 기축년(己丑年) 소띠 해입니다.
소 값이 개 값만도 못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긴축년이 될 것 같지만
행복이 골고루 펑 터질 날을 기대합니다.

건강하지 못하고 부자가 되면 속상합니다.
무조건 건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