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31

이심전심


어느 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拈華)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

가섭만이 '연꽃은 진흙 속에서 살지만 꽃이나 잎에는 진흙이 묻지 않듯이 불자(佛子) 역시 세속의 추함에 물들지 말고 오직 선을 행하라'는 뜻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진리를 아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모두 언어나 경전에 의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뜻)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출처] 엠파스 한자사전

팔만대중 중에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아침 점심을 같이 먹는다고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촛불이 타오르던 초심 같은 바이러스가 분명히 잠복하고 있어
슬며시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리라 믿습니다.
이심전심이 통하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2008-10-28

해변의 하루

10여 년 전, IMF 여파로 자금 유동성을 해결하려고 외자유치를 할 해외 투자사를 절실하게 찾던 시절. 급하게 날아온 협조문 한 장. 실사를 대비하여 부문별 현황을 영문으로 작성하되 현재 가치를 비롯해 미래 가치 즉, 핵심역량이나 노하우 등 지금 말로 하면 지식가치를 강조하라는 코멘트가 붙어 있었다.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H사와 동시에 받는 실사였기에 가치평가에 따라 투자사가 결정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한창 DJ가 빅딜을 강조하여 반도체 산업은 LG가 현대로 넘어가던 시절이라 실사 결과에 따른 투자 결정은 회사의 생사를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내가 속한 부문도 시급하게 자료 준비를 하려고 부서별 담당자가 모여 날밤을 까게 됐다. 그동안 만들어진 월말보고나 연보 등을 기초로 보고서용 목차가 정해졌고, 내용을 꾸미기 위한 자료들을 취합하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한국식 보고서가 아니라 코쟁이 입맛에 맞는 리포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네들은 숫자와 도표 등 간결하고 한눈에 결론이 난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내부 보고서용은 물론 요약이 돼 있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이 구구절절 서술돼 있어 그네들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오는 이들에게 간결하게 핵심을 전달하는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다.

자료는 충분했지만 요약해서 몇 줄로 만들고 눈에 쏙 들어오게 도표로 만드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다들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쥐어짜며 새날이 밝아올 때쯤에 약 50여 쪽의 리포트를 만들 수 있었다. 아침에 임원과 부서장이 모여 리뷰를 하면서 수정을 했지만, 내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렇게 실사가 시작됐고 회사가 열심히 준비한 결과인지 자산가치는 H사보다 적지만 미래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종합 가치는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 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외자유치는 무산됐고, 그 결과 두서너 번의 또 다른 실사가 이어졌었다.

얼마 후 H사는 둘로 쪼개져 국내 회사로 인수됐고, 내가 몸담았던 회사는 프랑스에 적을 둔 굴지의 화학회사가 50:50의 자본투자를 하게 된다. 그전에 투자유치가 되지 않으면 월급도 주지 못할 정도로 자금 유동성이 악화됐던 회사는 공장의 심장에 해당하는 유틸리티 설비를 외국회사에 매각했고, 수익이 나기 시작하던 공장 하나는 해외지분이 있는 동종의 계열사에 넘긴 뒤였다.

신기한 건 그렇게 어렵던 회사가 투자유치가 되면서 경기도 살아나고 연속되는 흑자를 내게 돼 말 그대로 보너스를 연봉의 절반 가까이나 받게 됐다는 것이다.

유추하건대 투자사는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하게 분석을 해서 단계별 손익을 예상하고 투자를 결정했을 것이다. 여기서 냉정하게 분석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동일한 데이터를 가지고 우리는 정성적으로 분석하고 그들은 정량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이다. 같은 재무제표를 들고 앉았지만 우리는 나와있는 숫자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해석하고, 그들은 미래에 대한 손익으로 환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컨설팅을 받아 봤지만 마지막에 컨설턴트가 하는 말은 다 똑같았다. "제가 물가까지는 끌고 갈 수 있지만 물을 먹는 것은 그쪽의 선택입니다." 지금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외국에서 보는 시각은 한국 시장에 계속 경고를 보내지만 정작 한국 경제팀은 말 바꾸기와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1990년대 말 금융위기는 당시에는 큰일처럼 보였지만 지금 세계가 겪고 있는 위기에 비하면 '해변에서 보낸 하루'라면서 현재 위기의 심각성이 한국, 러시아, 브라질 같은 신흥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컨설팅은 훈수나 다름없다. 다음 수를 이렇게 놓으라고 권할 수는 있지만 그 수를 두는 것은 정작 자신이다. 취사선택을 하여야 하지만 혜안이 높은 훈수를 물리칠 정도로 내 판만 보고 있는 것은 이미 형세판단을 그르치는 것이다. 변명이나 해설은 판이 끝난 다음에 해도 된다. 지금은 훈수에 대한 미래예측을 냉정하고 열정적으로 할 때이다. 훈수에는 유감(遺憾)이 있을 수 있지만 느끼는 바가 있는 것(有感)이 더 중요하다. 결정적인 것은 훈수를 CEO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해변에서 하루만 보내고 싶지는 않다.

2008-10-25

살맛안나


식인종이 밥투정할 때 하는 말이라지요.
요즘 식인종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도 식인종이 됐습니다.
정말 살맛이 나질 않습니다.
단체로 일순간에 식인종이 됐었던 시절도 있었지요.
갱제는 그 시절로 빽도한 것 같고,
정치는 80년도로 빠꾸한 것 같습니다.

살맛이 나지 않는 세상에 그녀들이 있어 위안이 됩니다.
꼭 1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이 흐른 지금도 그렇습니다.
덕분에 잠시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합니다.





여담.
박찬호 영어 이름은 Chanho Park이라고 하고
박세리는 Seri Pak이라고 표기하더군요.
박세리는 왜 'r'이 빠져 있을까요?

박찬호는 알이 두 쪽이나 있고, 박세리는 알이 없어서랍니다.

2008-10-23

가을, 남자는

Lonely man
남자는 세 번만 울어야 한답니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 때라고 합니다.

그 말을 곱씹어보면
세상에 백지상태로 태어난 존재의 출발을 알리며 울고,
존재의 이유를 찾아 백지를 채우려고 싸돌아다니다
존재의 출발점이 사라질 때 인연의 끝을 부여잡고 울며,
역사적으로 나라가 망하면 충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니
마지막 울음에는 존재를 마감하는 실낱같은 미련도 섞여 있는
인생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범부에도 못 미치는 소인배인지라
첫울음은 선택할 수 없어 기억나지 않는 절대 울음이었고
나라가 망해서 우는 경우는 살아생전에
개구리 겨드랑이에 털 날 확률보다 적어 보이긴 하지만
만약이라는 가정이 붙는다면 그때 가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선택할 것 같습니다.

남자는 일생에 세 번 울어야 하는 거라지만
정작 세월의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점점 울컥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패스트푸드를 먹는 세상이 오면서 오히려 가슴속 시장기는 커졌고
Y2K 버그가 아무 일 없이 조용하게 지나가며 신세기를 맞았지만
주책없이 그 버그가 내 안에 자리를 잡아 가끔 에러를 일으키다가
급기야 중대한 오류라도 일어나면 눈물이 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무인도에 혼자 사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녀서
그렇게 우는 게 눈치가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울다 나오면
변비 환자인 줄 알고 학문에 너무 힘쓰지 말라고 합니다.

봄 ○○는 쇠젓가락을 녹이고 가을 ○○는 요강을 뚫는다는 속담처럼
대대로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속담이 틀리지 않다면 가을 남자들은 기운이 왕성해야 하는데
요강은 고사하고 그 조차 들 힘이 없는 어깨가 점점 처지며 울고 싶습니다.

정치 뉴스야 먼 나라 이웃나라 얘기하듯 안줏거리로 씹으면 되지만
더는 졸라맬 허리도 없는데 뻑하면 고통만 뿜빠이 하자는
경제 뉴스가 헤드라인을 장식하면 속에서 눈물이 펑펑 흐릅니다.

때로는 남자도 소리 내어 울고 싶어 집니다.
게다가 가을비라도 내리면 왕년의 추억까지 덤으로 얹힌답니다.
올가을은 고독한 남자를 독한 남자로 만들어 슬퍼집니다.
올가을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목놓아 꺼이꺼이 울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지금 눈치 보며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가을 남자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행여 포장마차에서 쓴 소주를 자작하며 허공을 바라보는 남자를 보시면
뼈 없는 닭발이라도 건네는 붉은 악마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008-10-20

기도

기도란
지극히 부당하게도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옥스퍼드 대학 교수이며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쓴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이란 책에서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가 정의 내리다.

나 때문에 우주의 법칙이 무너지기야 하겠느냐마는
그래도 기도한다.
신도 어쩌다 실수하길 바라면서......

2008-10-16

명품 고수와 짝퉁 고수

바둑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아다리 밖에 모르지만 중계방송하는 유명한 바둑 대회는 챙겨 보는 편이다. 요즘은 이세돌 9단을 비롯한 신진 세력의 약진으로 돌부처 이창호와 일지매 유창혁은 무시로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둘이 연실 국제 기전에서 이름을 휘날린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가뭄에 콩 나듯 볼 수 있으니 바둑계가 상전벽해가 된 것 같다.

제비 조훈현과 잡초 서봉수가 한 세대를 풍미하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청출어람이 반집도 센다는 신산 이창호와 대마 킬러 유창혁이다. 그 둘의 기풍이 워낙 극과 극이었지만 상대방 급소를 날카롭게 찌르며 대마를 잡는 최고 공격수 유창혁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내곤 했다. 어떤 상대를 만나도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두는 기풍은 결과에 관계없이 박진감 넘치는 한판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혜성처럼 떠오르던 시절. 신문에 실린 기보 해설을 보고 있노라면 한 편의 무협지를 보는 듯했다. 특히 몇 수도 놓이지 않은 포석 단계에서는 앞으로 반상에 몰아칠 폭풍우를 예고하는 장황한 해설과 함께 등장인물을 알려주곤 했다. 그중 한 명이 유창혁이었고 이름 석자를 기억하게 된 계기가 됐다.

포석이 끝나고 일전을 겨루던 중 유창혁은 좌하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손을 빼고 좌변 중앙 상대방 진영에 백돌을 하나 놓았다. 해설자는 그 수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선수를 빼앗겼다고 아쉬워했다. 무림 고수들과 마찬가지로 바둑에서도 최강수로 버티며 일전을 겨루고 있는데 무의미하게 선수를 빼앗긴다는 것은 싸움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후 죄하변은 한 수 한 수가 외길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흑돌이 놓이면 백돌은 반드시 그곳에 놓일 수밖에 없는 접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16수가 진행되었을 때 두 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먼저 탄식을 지른 곳은 흑돌을 쥐고 일지매와 겨루던 기사였다. 대마불사라고 했건만 허무하게 흑대마가 잡히고 마는 불상사가 눈앞에서 벌어지자 저도 모르게 나온 탄식이었다. 또 다른 탄식은 기보 해설을 하던 해설자가 감탄하는 소리였다. 불과 조금 전에 무의미하게 두어서 선수를 뺏겼다고 아쉬워 한 백돌이 16수가 진행되자 흑대마를 잡는 빛나는 옥석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해설자는 16수 앞을 내다본 유창혁의 혜안에 감탄하며 그것으로써 바둑은 끝이 났다고 방점을 찍었다.

모두가 의문을 품은 한 수였지만 유창혁은 16수 앞을 내다보고 던진 회심의 일격이었다. 흑은 그 한 수를 받았어야 했지만 좌하변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미처 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에 벌어진 수순은 여러 가지 가상도로 살펴보아도 흑대마가 잡힐 수밖에 없는 외길 수순이었다. 그 후 유창혁은 세계적인 기전에서 날렵한 솜씨를 뽐내며 승승장구하여 입신의 경지에 오른다. 바야흐로 무림 고수의 반열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요즘 그런 고수를 뉴스에서 보았다. 쌀 소득보전직불금이라며 평균 60만 원씩을 챙긴 양반들이 그들이다. 그네들은 60만 원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한 끼 외식비 밖에 안 되는데 왜 꼬박꼬박 챙겼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농지를 사서 8년 동안 직접 경작하고 있다는 게 증명이 되면 세액에서 1억 원까지 양도 소득세를 감액해주게 돼 있다고 한다. 반면에 자경이 아닌 비사업용 농지에 대해서는 양도차익의 66%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가장 짧은 경우 2년만 위장 전입하고 나서 직불금을 받으면 이를 근거로 낮은 양도세율을 적용받는다고 한다. 이러니 눈에 불을 켜고 직불금을 받으려고 한 까닭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2006년 한 해에만 쌀 소득보전직불금 수령자 99만 8천여 명 중 17만여 명이 실제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1천683억 원을 부당하게 받았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그중 공무원은 약 4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농사짓지 않는 사람이 농지를 사기도 쉽지 않거니와 8년 후에 되팔아 생길 양도 소득세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 할 혜안을 가지고 있어 부럽다. 가히 유창혁이 16수 앞을 내다본 한 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잘 몰랐습니다'라며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씨부리는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모르고도 그런 짓을 한 동물적 감각을 가진 타고난 고수임이 틀림없다. 만약 알고 그랬다면 더 무서운 필살기를 펼쳤으리라.

그런데 고수가 너무 많다. 자고로 고수라 함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희소성도 있어야 하는데 직불금 고수가 많게는 20여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가히 고수의 홍수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농사꾼 가슴에 봉홧불을 짚인 여인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고수의 실체가 상상 이상으로 커지자 고수 중의 고수를 골라내기 위한 정부의 고민이 더욱 커지나 보다. 물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고수만 가려내 퇴출시키는 시늉을 하고 나머지는 그저 생활의 달인이라고 평가절하하며 흐지부지 넘어가려고 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상한 건 직불금을 받은 양반들을 고수라 추켜세웠는데 경외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들은 짝퉁 고수이기 때문이다. 유창혁과 같은 진정한 명품 고수는 한 번에 두 수를 두지 않지만 짝퉁 고수는 상대방의 응수가 있기도 전에 이곳저곳에 꼼수를 둔다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아는 이들이라면 진작에 짝퉁 고수가 되는 길로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짝퉁 고수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여 직불금을 받아 보긴커녕 착불금만 내 본 소시민은 슬프다. 더군다나 가슴에 봉홧불이 활활 타오르는 농사꾼의 심정은 말로 해서 무엇하랴.

2008-10-14

뻥 치는 소리

우리나라에는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노인네들이 하는 말, 시집 안 갈 거라는 노처녀가 하는 말 그리고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이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런 거짓말을 들으면 액면 그대로 믿지도 않을뿐더러 얘기하는 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면 낚시꾼이 하는 말을 들 수 있겠지요. 얼마나 잡았느냐고 물어볼라 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피라미를 잡고도 팔뚝을 들어 보이며 썰을 풀기 시작합니다.

옛날 어떤 낚시꾼이 바닷가 절벽으로 낚시하러 갔답니다.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만 달랑 있는 절벽에 앉아 낚싯줄을 던졌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데도 신호가 오지 않아 하품을 하던 그때 낚싯줄이 팽팽해졌습니다.
- 앗싸. 드디어 한 마리 걸렸구나.

낚싯대를 잡고 밀었다 당겼다 하는데도 도무지 딸려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낚시꾼이 딸려 갈 정도로 기운이 넘치더랍니다. 점점 힘이 부치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나무 있는 곳까지 가까스로 당겨 낚싯대와 줄을 풀리지 않게 어렵사리 동여매 놓고 옆에 앉아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담배 한 갑을 다 태웠는데도 팽팽한 낚싯줄은 사그라질 줄 몰라 그대로 두고 철수를 했답니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절벽에 올라간 낚시꾼은 허걱 하며 뒤로 나자빠졌다네요. 낚싯대가 걸려 있던 소나무가 뿌리째 뽑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여태 들어 본 낚시꾼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뻥입니다. 그 낚시꾼은 군산 출신인데 못 믿겠으면 군산에 있는 그 절벽을 보여주겠다며 따라나서라고 얘기를 마치며 큰소리 뻥뻥 쳤답니다.

이런 뻥 치는 소리는 듣는 동안 재미있고 그 절벽이 바닷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뻥 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은 허허허 하며 즐길 뿐이지 멱살을 부여잡고 당장 그곳에 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지요.

요즘 환율이 널뛰기하며 금융시장이 불신을 받는 것이 리만 브라더스가 신뢰가 중요하다고 똥폼 잡으며 뻥 치기 때문이라지요. 리만 형제는 낚시꾼보다도 재미를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월척을 낚아 올려 보란 듯이 내밀지도 못하며 뻥을 치고 있나 봅니다. 낚시꾼 뻥 치는 소리야 재미있게 웃어넘길 수 있지만 재미도 없고 감동은 더더욱 없이 뻥 치는 소리는 시장이 먼저 알아보는 것이겠지요.

"이 사람 믿어 주세요. 보통 사람입니다"라고 뻥 치던 그 시절처럼 "신뢰야말로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며 라디오까지 나와 줄기차게 얘기합니다. 신뢰와 소통이 낚시꾼의 뻥을 제치고 한국의 네 번째 거짓말로 영원히 남을까 걱정스럽습니다.

2008-10-09

한글


1.
막바지 훈민정음 만들기에 정신이 없던 세종대왕 앞에 코쟁이가 찾아왔다. 인도를 향해 항해하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며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다. 가뜩이나 피곤하고 신경이 예민해진 세종은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 아무러케나 져.
코쟁이는 연방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고 물러났다. 그렇게 이름을 붙여 오늘날에 아메리카 대륙이라 부른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얼마 안 되어 코쟁이가 또 찾아와 엎드렸다. 이번에는 나라 이름을 지어 달라고 애걸했다. 성공리에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은 기분이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 가나다로 하여라.
이렇게 이름 붙여진 나라가 Canada이다.

믿거나 말거나.

2.
유네스코에서 1990년부터 해마다 문맹 퇴치에 기여한 이들에게 주는 상의 이름이 '세종대왕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이라고 합니다. 상금 3만 달러는 한국 정부에서 내놓는답니다.

3.
올해 영어교육사업에 들이는 예산은 1861억 9052만원에 달했다. 그러나 한글교육 및 문화 육성에 들이는 돈은 119억 2925만원에 불과했다.

한글학회가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았지만 재정난으로 우리말사전 편찬 등 주요 현안 사업을 착수조차 못하고 있다.

4.
남대문이 홀라당 타고나서야 우리는 숭례문이라고 부릅니다. 국보 1호를 한글로 정하면 불에 태울 염려는 없겠지만 행여나 불태우는 것보다 더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오늘은 훈민정음 반포 562돌이라고 합니다.이렇게 단 하루라도 한글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날이 있어 다행입니다. 물론 빨간 날이었으면 고마움이 배가 되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