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12

고향


고향 내려가시나요?

고향은 늘 낮은 곳에 있어서
땀 흘리지 않고도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더 높이 오르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니
낮은 곳에서 왔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그림자를 느리우며 반겨주고
어느새 얕아진 냇가에는 소금쟁이들이 장난을 겁니다.
들판에는 고단한 여름을 이겨낸 낟알이 익어가고
볼품없는 장독대에는 어미의 맴이 담겨 있습니다.

쉼 없이 숨차게 오르던 짓을 잠시 멈추고
가진 것 없이 나눌 줄 아는 넉넉한 그 품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하는 바램만큼
딱 고만큼 아름 가득 정을 담아 오시기 바랍니다.

내 발자욱 소리를 기억하는 고향 가을을 쏘다니며
주섬주섬 담은 정만큼 올라가는 발걸음은 가볍답니다.

2008-09-11

Smoking kills


매달 담배를 끊자고 결심한다. 1월 1일, 2월 2일, 3월 3일...... 일 년에 열두 번 결심을 한다. 희한한 것은 결심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술자리가 생긴다. 1/n이 아닌 공술이 꼭 생긴다는 야그다. 맨 정신으로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견딜만한데 술이 몇 순배 돌고 껌 씹는 소리를 할 때면 그 유혹을 참기 어렵다. 슬쩍 남의 담배 한 개비를 들고 만지작만지작 거리다 보면 어느새 조동이에서 연기를 피우고 있다. 그렇게 작심삼일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길어야 보름을 넘기지 못한다. 담배와 술을 동시 패션으로 끊으면 가능할 것 같은데 고것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한다는 말씀.

마누라 만나지 35년밖에 안 됐지만 담배를 만난 것은 45년도 더 됐다며 늦게 나타난 마누라가 담배를 끊으라는 게 말이 되냐며 청솔을 꺼내 물던 연세 지긋한 기사 양반이 생각난다. 이십여 년 전 택시를 타고 맞담배질하며 가던 이야기이니 지금은 드라마에도 나오지 않을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나이 같은 일화가 된 지 오래다.

지난 9월 9일에도 금연해야쥐... 하며 습관성 결심을 하는데 유럽 출장길에 사 왔다며 예쁜 열쇠고리와 함께 담배를 선물로 받았다. Small Cigars라는데 첫 모금이 목에 탁 걸린다. 독하다. 그래도 선물인데 매정하게 버릴 수야 있느냐며 천천히 음미해보니 그런대로 맛이 괜찮다. 자판기 밀크커피만 마시던 놈이 원두 블랙커피를 처음 맛본 느낌이랄까. 시가형이라서 그런지 가끔 담뱃잎이 혀끝에 묻어 퉤퉤 거리며 피는 모양새가 처음 담배를 입에 댄 그때가 떠오른다.

고3 시절. 할머니가 캐비넷에 꿍쳐둔 오래된 새마을 한 갑을 몰래 빼내 친구들을 만났다. 나름 고삼 스트레스를 날려 버린다고 청자를 피던 넘들은 필터 없는 새마을이 신기하다며 서로 자기들 담배와 바꾸자고 아우성이었다. 필터 없는 새마을이 나오지 않은지 꽤 됐던지라 청자와 바꾸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렇게 얻은 새마을을 한 모금 빨고 퉤퉤 거리고 다시 한 모금 빨고 퉤퉤 거리던 친구들 기억이 난다.

호기심 반 반항심 반으로 뻐끔 담배 배우던 시절을 지나 대학 1학년 때 문무대를 입소하고부터 본격적으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대학 다니는 남정네라면 열외 없이 끌려가던 문무대는 지금 생각해도 군대 훈련소보다 더 빡셌던 것 같다. 5분간 휴식시간에 피우던 그 담배는 꿀맛보다 더 달콤했었다. 지옥 같은 일주일을 견뎌낸 것은 뻑뻑 피워대던 담배 힘이었다. 그러고 보니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한 것은 나의 실수라 치지만 담배를 피우도록 강요한 것은 국가였다. 뭐 그렇게라도 핑계를 가져다 붙이고 싶다는 바람이다.
"Smoking kills"
선물 받은 담배에 경고문이 큼지막한 것이 섬뜩하다. 찌라시 같은 우리나라 담배 경고문은 차리리 나긋나긋한 느낌이 난다. '특히 임산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다'라고 하니 나는 예외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니 말이다.

생판 모르는 이에게도 '담배 하나만 빌려 주세요'라고 말하면 '언제 갚을 건데요?'라고 묻지도 않고 흔쾌히 주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인심 좋던 시절도 가고 거저 주기가 참 아까운 세상이 돼서 그런지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는 경고문이 "내 담배 피우면 죽어!"라고 생각이 되는 건 왜일까?

미련 곰탱이 같은 백해무익한 나의 애욕이여......

2008-09-10

Harmony


몇 해 전, 경부 고속도로 상행선 추풍령 휴게소.
부리나케 화장실을 찾아 자꾸를 내리고 볼일을 보는데
옆에서 멀쩡하게 차려입은 양반이 전화를 받는다.

- 어. 내다. 왜 전화질이고.
……
- 어디긴 지금 회의 중이다.
……
- 바쁘다. 오늘 늦는다. 고마 끊는데이.

회의를 화장실에서 하나?
볼일을 마치고 핫바를 오물거리며 서 있는데 그 양반이 탄 중형차가 지나간다.
커다란 라이방을 대굴빡에 걸친 예쁜 여인네가 생글거리며 옆에 앉아 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입은 옷 때문에 오해를 받는 사람도 있고,
뻔지르르하게 옷을 입고 허우대 멀쩡하지만 마음이 썩어 있는 사람도 있다.

사랑하는 마음은 굴뚝같은데 표현을 못 할 때도 있고,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을 때도 있다.

내용과 형식을 조화시키는 것.
마음과 표현을 조화시키는 것.
참 어렵다.
왜 우리는 피노키오 코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을까......

2008-09-09

종종 잊고 사는 것들

1.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을 탈 때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나는 머릿속에서는 왕왕 울리지만 자신조차 들을 수 없는 소리로 입술을 오물거리며 중얼거리곤 합니다.
- 워매. 인간들 절라 많네.

며칠 전이었습니다. 발을 들자마자 내려놓을 자리가 없어져 버리는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은 아니었지만, 전후좌우로 몸을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인지라 문 옆 기둥에 기대서 멍 때리고 있었습니다.

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내리고 타기 시작합니다. 맨 마지막에 어떤 양반이 비집고 타면서 한마디 하더군요.
- 뭔 인간들이 이렇게 많아.
그 양반이 악의를 가지고 한 말도 아니고 정작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한 말이라서 아무도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귀에 거슬리더군요. 그 양반이 비집고 올라탄 덕분에 기둥에서 밀려났기 때문이죠. 속으로 한마디 했습니다.
- 당신만 안 탔어도 내가 밀리진 않았어. 이 양반아.

지하철에서 내려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그 양반처럼 구시렁대며 탔더군요. 많은 인간들 땜시 내가 불편하다고만 생각했지 정작 내가 지하철을 더 만원으로 만들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겁니다.

2.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받자마자 언성을 높이며 첫마디를 합니다.
- 야 이놈아. 뭐가 그리 바빠서 전화 한 통 없었냐?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받자마자 목소리를 높이며 친구가 말합니다.
- 야 이 자슥아. 뭐가 그리 바빠서 전화 한 통 없었냐?
살짝 기분이 상해서 대꾸합니다.
- 이런 씨뱅이. 피차일반이다. 너는 왜 먼저 전화 안 했냐?

내가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는 전화는 친구가 먼저 걸었다는 걸 종종 잊고 삽니다.

2008-09-08

파격

중매로 만난 부모님 세대.
우물가에서 눈이 맞은 커플은 파격이었다.

미팅으로 만난 7080 세대.
무도회장에서 눈이 맞은 커플은 파격이었다.

무한자유연애로 만난 세기말 세대.
커밍아웃으로 눈이 맞은 커플은 파격이었다.

인터넷으로 만나는 신세기 세대.
이제 ET와 눈이 맞는 커플이 파격이다.

파격(破格)은 격파(擊破) 하기 어렵지
한 번 깨지면 더는 파격적이지 않다.
파격적인 변화가 필요한 격파(激波)의 계절이다.

2008-09-04

대중지성의 지혜

대중지성은 과연 지혜로운가? 신영복 교수는 최근 나온 책 『여럿이 함께』에서 영국 유전학자 프란시스 골튼(1822 ~ 1911년)이 시골 장터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시골 장터에서 열린 황소 몸무게 알아 맞히기 퀴즈에서 아무도 답을 맞히지 못했지만, 퀴즈에 참가한 사람들이 적어 낸 몸무게를 합쳐서 나누어 보니 맞았다는 이야기다. 신교수는 "단 한 사람도 맞히지 못했지만, 여러 사람의 판단이 모이니까 정확한 몸무게를 맞힐 수 있었다. 언론도 얼핏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대중의 지혜를 모아 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중은 잘 안다"고 했다. '대중의 지혜'는 디지털 철학자로 잘 알려진 피에르 레비 교수의 "개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집단은 가능케 한다"는 '집단 지성'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강준만 교수의 의견은 다르다. "대중의 지혜는 사실 하나마나 한 소리다. 확률적으로 대중은 늘 지혜롭게 돼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 자체의 힘(머릿수 파워) 때문에 대중의 선택은 정당화되고 지혜가 되게끔 돼 있다. 대중은 이미 '지혜'라는 답을 내장하고 있는 개념이다. 예컨대, 대중이 선거에서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망정 그걸 무슨 수로 꾸짖을 것이며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215쪽)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경향신문 특별취재팀/후마니타스 20080415 264쪽 14,000원

대중지성이라......
김대중의 민주화 투쟁 열정이 맨유로 간 박지성의 심장처럼 펄펄 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