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29

애국 설문지


1.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하며 기쁜 마음으로 군대에 갔다.
2. 즐거운 마음으로 세금을 낸다.
3. 재벌을 보면 항상 존경스럽다.
4.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가난한 것은 당연하다.
5.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하면 절대 손해 보지 않는다.
6.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
7.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간다고 하면 제일 먼저 손을 든다.
8. 국민연금이 있어 나의 노후는 풍요롭다.
9. 정치는 우리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만든다.

한 항목이라도 Yes 하신 분은 애국자이십니다.

마지막 설문입니다. 저는 이미 짐을 꾸리고 있습니다.

10.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당 22억씩 준다고 해도 이 땅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2008-08-26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

#1
떠나겠다는 생각을 언제 처음으로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 처음으로 누구에게 그런 생각을 털어놓았는지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것은 떠나겠다는 생각이 언제부터 나를 사로잡고 언제부터 내 삶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안다는 말이다. 나는 이십오 년 전부터 고비 사막을 횡단하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과연 아직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2쪽)

#2
나는 곧 예순 살이 될 터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다! (16쪽)

#3
물론 내게는 유럽의회 의원의 직분에 속하는 온갖 의무들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했다. 의정 활동 중에는 항상 현장에 참석해야 하고, 언제나 연락 가능해야 하고, 어떤 질문에 대해서든 늘 답변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언제든 정치적 인물로서 눈에 띄어야 했다. 사막에서라면 우리는 존재하는 동시에 완전히 여분으로 남는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삶에 짐이 되었던 수많은 일들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로부터 벗어나 있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날 찾거나 필요로 하거나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나를 볼 수 있는 거울도 없는 곳이라면 나 자신마저도 더 이상 아쉬울 게 없기 때문이다. (17쪽)

#4
원래 내키지 않는 삶을 오래 산다는 것은 자기의 백일몽을 좇는 것보다 더 어렵고 결국 더 용감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마흔 살이 되어서 그것을 아주 다르게 생각했던 일이 기억난다. (95쪽)

#5
집을 떠나 길을 돌아다니고 있는 내 상태가 때때로 나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드는가! 술에 취한 두 사람 때문이 아니었다. 약탈을 당하거나 맞아서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전쟁 중이거나 위험이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 있는 토착민들도 공격적이거나 난폭하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 혼자 불확실한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혼자 있다는 사실과 아주 다양한 형태의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대개는 엉망진창인 그런 감정들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을 알코올 중독이 되거나 자살하게 만드는 것은 외롭다는 감정이었다. (122쪽)

#6
나처럼 돌아다니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문가란 날씨가 어떻든 깜깜한 밤중이든 때에 맞추어 가고 어떤 상황에서든 출구를 찾아낼 줄 안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사람들이 미리 인식하고 피하는 것은 내가 경탄하는 기술이다. 나는 도박처럼 모험에 승부를 거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 적이 없다. 진짜 기량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험에 아무것도 걸지 않는다. 많이 감행할 뿐이다. (149쪽)

#7
사막은 실험의 장이 아니다. 사막은 그저 있을 뿐이고, 나름의 확고한 법칙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내가 지니고 있는 물이 지금 여기서 바닥나고 있다. 유목민을 발견하지 못하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치료해서 고칠 수가 있다. 죽는 것만 고칠 수 없다. 사막은 모든 정치와 그에 대한 온갖 생각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인적이 없는 세계에서 조절되어야 할 게 무엇이겠는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걸어가는 것뿐이다. (169쪽)

#8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단숨에 되지 않는다. 사막을 횡단하려면 작은 걸음들이 수백만 번 필요하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이 길의 한 부분이 되고, 경험의 일부가 된다. 모든 탐험이 매번 진짜 삶이었다. 첫 탐험이든 마지막 탐험이든 마찬가지다. 사막을 횡단하는 나의 길은 나 자신을 뚫고 지나가는 길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끝에 구원이 없었다. 나 자신이 늙어 가는 것에 대한 통찰만 있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도 이제 그 통찰에 속했다. 내 때가 되기 전에 벌써 마지막에 다다른 것처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이런 깨달음이 남았다. (225쪽)

#9
권리라는 것은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당연한 요소가 아니다. 도시의 사회 모델에서는 권리가 협상의 대상이 되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법률로 확정된다. 그래서 결국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 규칙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볼 때 유목민들은 어디서나 배제되어 있다. 아무도 유목민들을 데리고 있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몽골에서조차 유목민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몽골인들은 오히려 유목민들과 그들의 생활 방식을 부끄러워한다. 원시적이고 시대에 뒤져서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몽골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나는 유목민들과 함께 있을 때 안전했다. 오히려 도시에서 살 때는 그렇지 못했다. 고비 사막을 돌아 다닐 때 나는 행운에 기댄 적이 없다. 우리 모두 사막에서 독자적으로 살아 남으려고 애쓰는 존재이기에, 수도 없이 많이 느끼는 두려움과 어려움은 우리에게 함께 나누는 법을 가르쳤다. 공감은 결국 불안을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나누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236쪽)

#10
고비 사막의 횡단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물론 고비 사막을 횡단 했다고 해서 내가 현명해진 것도 아니고 녹초가 된 것도 아니다. 늙어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스스로 보기에도 그랬다. 이게 아니다. 한탄하려는 게 아니다. 나름대로 잘 늙어 가는 요령도 익혔다고 주장하고 싶다. 잘 늙는 것은 아직 내가 해야 하는 유일한 도전이다. (257쪽)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라인홀트 메스너/모명숙 옮김/황금나침반 20061117 259쪽 12000원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는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 미터급 14봉을 모두 완등 했다. 그린란드, 티배트 동쪽, 남극지방, 서고비 사막도 횡단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는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순의 나이에 그는 고비 사막을 횡단하는 도전을 시작한다. 삼십 리터 물통, 텐트와 침낭, 셔츠 한 장, 바지 하나, 갈아 신을 양말 한 켤레, 지도와 메모용 노트를 넣은 배낭 하나를 메고 고비 사막으로 갔다.

그가 고비 사막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생각하고 느낀 것은 무엇일까? 고비마다 도움을 받은 유목민들에게서 느끼는 행복감, 사막 한가운데에서 죽음에 직면하며 마주한 자신과 그럴수록 생각나는 가족, 그리고 자유의지로 들어선 고비 사막에서 그를 걷게 만든 것은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이제 잘 늙어 가는 것을 깨닫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도전이라고 말한다.

2008-08-23

태권도에 대한 추억

나는 태권도 까만띠를 매 봤답니다. 물론 야매지만요.
- 넌 체구가 쪼매 하니까 운동을 해라.
촌에서 도회지로 나오자마자 반강제적으로 다닌 곳이 태권도 도장이었습니다.

도장 가는 길이 무서웠답니다. 당시 다니는 태권도장은 오도관이었는데 그 도장을 가는 길에 무덕관이 있었지요. 어린 마음에도 파가 다르다는 걸 알고 무덕관 앞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빙 둘러 도장에 가곤 했답니다.

그때가 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다니다 보니 빨간띠를 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두려웠던 시간은 자유대련 시간이었습니다. 비슷한 체구나 급수를 따져 대련을 하게 했지만 내게는 동성의 맞상대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꼭 맞붙는 상대가 쪼매 키가 컸던 상급생 누나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 그 누나는 자유대련하려고 나와 붙을 시간이 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덤벼들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누님은 항상 나와 맞붙을 줄 알고 그 시간만 되면 자신만만하게 나와서 인사를 했답니다.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깨지지는 않았지만 그 누님의 눈빛을 보면 절반은 깨갱 하면서 주눅이 들곤 했답니다. 태권도는 품새도 중요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상대방과의 대련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라. 그렇게 다니다 보니 학교에서 내가 제일 급수가 높더라고요. 그래서 전교생이 집합한 운동장 제일 높은 곳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답니다. 그 시절에는 다 모여서 태권도를 하는 시간이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교사 선생님은 나를 비롯해 태권도를 배우던 아그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시더군요.
- 이번 운동회 때 태권도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열심히 하자.
거부권도 없던 철없는 시절-부모님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지만-이라 모두가 어리둥절할 때 선생님은 말씀하셨죠.
- 음. 태권도 격파 시범을 하기로 했어.
그렇다고 별도로 격파 연습을 한 건 아닙니다.

만국기가 걸려 있는 운동장에서 태권도 시범을 하는 시간. 그래도 내가 급수가 가장 높으니 검정띠를 매라고 하더군요. 본의 아니게 까만띠를 매고 격파 시범을 하게 됐답니다. 김밥을 싸들고 온 어머니 할머니들은 숨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이 야얏."
함성과 함께 일렬로 서 있던 우리는 앞에 놓인 기왓장 열 장을 우렁찬 기합과 함께 정권으로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내려쳤습니다. 기왓장을 힘찬 기합과 함께 내려쳤는데 달랑 네 장만 깨졌습니다. 에구 창피. 하지만 한 줄로 서서 마치 슬로비디오로 내려치는 장면 같아서 뽀롱나지는 않았습니다.

시범이 끝나고 거두어 온 기왓장을 만지며 왜 이리 안 깨졌지 하며 두 손으로 움켜쥐자마자 후드득 부서지더군요. 소금물에 절인 기왓장이라고 하더이다. 무지 쪽팔렸습니다. 아마 그때가 4학년쯤 됐을지 싶습니다. 그 후로 어디 가서 태권도했다는 얘기를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엊그제부터 베이징 올림픽에서 태권도를 중계방송하더군요. 참 재미없습디다. 겨루기로 승부를 내는 것 같은데 규칙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두 선수가 2분 3회전인가를 발만 동동 구르다 끝나더군요. 점수를 땄는지 모르지만 발차기 한 번 하고는 팔을 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더군요. 오죽하면 누리꾼이 스카이콩콩 같다고 하겠어요.

뭐 들리는 말로는 채점을 위해 전자장비를 개발했는데 협회 내부의 이권 싸움으로 채택이 안 됐다는 소문이 들리는 걸 봐서는 올림픽에서 퇴출이 돼도 할 말은 없을 것 같더군요.

혹자는 운동의 정신을 봐야 한다며 태권도가 두 발만 콩콩 구르는 것도 작전이라며 유도는 도복 끝을 붙잡으려고 하다 끝나는 운동이라고 악평을 하더군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태권도에서 겨루기는 품새를 끝낸 고수들이 모든 걸 걸고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두 발로 통통 튀기만 하다 관중도 모르는 포인트를 얻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나와 겨루기 하던 그 누님의 눈빛이나 투지가 두 발이나 두 손에서 나오는 걸 잘 활용해서 제삼자가 봐도 흥미 있는 종목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순간적인 포인트 공격보다는 5분 동안 겨루기를 해서 판정을 하고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추가 5분 동안 겨루기를 지속하면 어떨까 싶네요. 판정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켜본 관중이 잘 알 테니까요. 적어도 핸드볼처럼 영상판독 하자는 사태까지 가지는 않겠지요.

아. 태권도 겨루기를 잘하던 고왔던 그 누님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실까......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를 보면서 내가 식겁할 정도로 발차기를 잘했던 예쁜 누나가 생각납니다.

2008-08-21

일시에 쥐를 잡자


지난 5월 초 농수산식품부가 일간지에 낸 광고입니다. 미국에서 수입되는 쇠고기와 미국 사람이 먹는 쇠고기는 똑같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농수산부가 아니라 주한미국농수산부 냄새가 납니다.

2008년 2월 25일 이후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연행자의 자살예방을 위해 국가에서 브라자까지 관리합니다. 경찰관 아저씨들은 1명의 시위자를 서로 먼저 검거했다고 다툽니다. 금융실명제를 벤치마킹해서 인터넷 실명제를 하려고 합니다. 대통령 각하는 태극기를 거꾸로 들고 응원을 합니다.

이렇게 거꾸로 갈 바에는 해방 후 반민특위시절로 돌아가서 정리정돈을 다시 하고 싶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바로 이 시절까지는 빽도 했으면 좋겠네요.


일시에 쥐를 잡자. 농수산부도 이쁜 짓을 할 때가 다 있었네요. 치명적인 실수는 그때 쥐를 다 잡지 못해서 지금 생고생하고 있다는 겁니다. 공무원이 제대로 일하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2008-08-18

텃세와 수준의 관계

1.
일본으로 친선경기 원정을 간 한국 야구팀은 생전 처음 보는 투구에 깜짝 놀랐다. 별별 공을 다 봤지만 일본 투수가 던지는 공은 보도 듣지도 못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마구(魔球)라고 밖에는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크게 와인드업 한 투수는 공을 땅속으로 던졌다. 땅속을 파고 오던 공은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튀어나와 포수 글러브로 쏙 들어갔다. 타석에 선 한국 선수들은 공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니 멍 때리다 그대로 삼진을 당했다. 한국 감독은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공이 굴러오든 기어오든 스트라이크존만 통과하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타자들은 9회가 끝날 때까지 멍 때리다 모두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수비를 선방해서 0:0으로 무승부를 했다는 것이다.

국내로 돌아온 한국 감독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달에 일본팀이 원정을 왔을 때도 선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홈경기에서 일본에 져 받을 비난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두더지 공을 막을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좀처럼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감독은 손뼉을 딱 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일본팀과의 홈경기가 벌어지는 날. 1회 말 한국팀의 공격. 예상대로 두더지 공을 던지는 일본 투수가 선발로 나왔다. 와인드업하고 공을 힘차게 땅속으로 던졌다.순간. 일본팀은 모두 허걱 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땅속으로 들어가 굴을 파야 할 공이 그대로 바닥에 꽂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경기 며칠 전. 투수석에서 포수석까지 땅을 파서 공구리를 쳐버리고 살짝 흙으로 덮어놨었던 것이다. 그날 한국은 대승을 거뒀다.

2.
어릴 적 보았던 만화였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라운드에 공구리를 친 것이 홈경기의 이점이라면 텃세가 맞을지 싶다.

올림픽이 열리는 베이징 양궁장. 경기장 생김새부터 중국 응원 텃세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여자 단식 결승에 오른 한국의 박성현 선수와 중국의 장주안주안 선수. 경기 결과는 중국의 금메달, 아쉬운 박성현의 은메달. 중국 관중은 호각을 불고 야유를 했지만 경기 후 박성현 선수는 남을 탓하지 않았다. 아울러 양궁장에 있던 한국 관중은 맞불 응원을 한 것이 아니라 매너를 지켰다.

3.
야구장에 공구리를 친 것이나 양궁장에서 호각을 분 것은 텃세다. 텃세는 급조하기 쉽고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당위성을 얻으려 하지만, 그 순간 스스로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고 매너를 지키는 수준이 되면 텃세까지도 용서하며 즐길 줄 안다는 것이다.

텃세와 수준은 언제나 반비례한다. 중요한 것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으로 통용된다는 사실이다. 스포츠에서 텃세는 메달의 색깔을 바꾸지만 일상에서의 텃세는 우리 미래의 색깔을 바꾼다.

2008-08-11

꼴찌에게 갈채를

1.
국립 도서관에 들렀다 강남 터미널 쪽으로 걸어 내려오는 길. 강남성모병원 앞 네거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경찰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88 서울 올림픽 마라톤 10㎞ checkpoint. 네거리에 잠실 경기장을 출발한 마라톤 경기가 10㎞ 지점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었다. 마라톤 경기가 올림픽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열리는 경기라면 폐막식 날이었나 보다. 그 현장에 나도 함께 있기로 했다.

2.
잘 보이는 네거리 모퉁이에 자리를 잡은 지 채 몇 분도 안 돼 경찰이 자리를 옮기란다. 기껏 자리 잡고 있는데 옮기라는 이유도 모르며 모퉁이에서 조금 물러났다. 경찰은 우리가 자리를 옮기자 일장기를 든 일본 관광객들을 그 자리로 안내해 왔다. 뭐 저런 쌍코랑 말코랑 같은 경찰이 있나 하면서도 모두가 참는다. 이국에서 구경 온 관광객에게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기로 묵시적 약속을 한다. 그곳에 있던 내게는 텃세를 부리지 않고 남을 배려한 최초의 글로벌 집단행동이었다.

3.
멀리서 일등으로 달려오는 선수가 보인다. 네거리에 있던 모두가 열렬히 환호하기 시작했다. 선두그룹에 이어 중간그룹과 후미그룹도 지나간다. 선수들이 다 지나갔으려니 하던 찰나. 커다란 함성과 일등보다 더 큰 환호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제일 마지막 선수, 일명 꼴찌가 나타난 것이었다. 일련의 마라톤 선수들이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위용은 꼴찌만 못했다. 꼴찌 뒤로는 지원차량 한 무더기가 꼴찌의 속도에 맞춰 따라오고 있었다. 마치 꼴찌 선수가 그 모두를 이끌고 달리는 것 같다. 장관이다. 더군다나 꼴찌 선수는 손을 흔들며 답례를 하는 여유를 부리며 지나간다.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올림픽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그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다. 꼴찌에게 갈채를.

4.
10㎞ 지점을 마지막으로 지나간 그 선수가 꼴찌로 완주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앞을 웃으며 손을 흔들고 지나가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현장에서 지켜본 올림픽 경기의 전부다. 매스컴은 금메달을 화려하게 조명하고 세상은 일등만을 기억할 때 꼴찌에게도 갈채를 보냈던 그 가을이 생각난다.

2008-08-07

숫자로 보는 한중일 올림픽


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의 전반적인 수준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마이카 시대가 시작됐고, 해외여행을 나가기 시작했고, 외국인을 외계인처럼 보는 눈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가는 시대가 도래했다. 한마디로 글로벌 가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후 20년이 지나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한다. 우리는 일본보다 24년이 뒤졌고, 중국은 우리보다 20년이 늦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일본보다 24년이나 늦게 올림픽을 개최했지만 그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있고, 20년이나 늦게 올림픽을 개최하는 중국이 20년 후에도 우리와의 격차가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우리는 샌드위치 신세'라는 표현은 너무 곱상하다. 우리는 프레스에 놓인 찌그러진 양철판 신세다.

베이징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보며 우리보다 20년이나 늦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비웃지 마라. 베이징 올림픽 슬로건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One World One Drea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