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30

전교회장은 아무나 되나?

2004년 4월 15일. 대한국민학교 제 17대 대의원을 뽑는 날이다. 그 전날. 나를 비롯해 놈상들 몇 명이서 술내기를 했다. 결과를 맞혀 꼴찌가 술을 사기로. 대의원을 뽑는 대한국민학교는 전교회장 탄핵이라는 교무회의 발표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었다. 탄핵의 후폭풍이 거세지만 대한국민학교 학생들 성향을 봐서는 뚜껑열린반이 과반수를 넘기기는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과반수를 차지하리라고 예측한 놈은 내가 유일했다.


선거 다음 날. 소위 말하는 수구꼴통은 절대 아니지만 전교회장은 무조건 싫다며 딴나라반에 올인했던 B가 술을 샀다. 투표는 팽개치고 개심사 입구에 있는 백숙 집에 가서 닭다리를 같이 뜯었던 그 놈상이다.

지금 대한국민학교는 연말에 다음 전교회장을 뽑는다며 벌써 난리다. 선거를 이십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나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가관이다.

뚜껑열린반은 말 그대로 뚜껑이 열려 옆반하고 합치느니 마느니 하며 책걸상을 옮기느라 시끄럽다. 우리반을 지켜야 한다는 학생들은 이미 기타반으로 자리를 옮긴 회장과 꿍짝을 맞추고 있다.

관전의 재미는 지금 딴나라반이 쥐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UCC보다 흥미롭다. 회장선거에 나갈 수 있는 유력한 후보 두 커플-놈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서리-은 내가 잘 났니 네가 못났니 하며 껍씹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날마다 교탁위로 뛰쳐 올라가 조동아리로 완투 펀치를 날린다. 그 뒤로는 똘마니들이 우르르 서 있고. 그동안 같은 반 동급생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는다. 마치 예비고사만 통과하면 대학 수석입학은 떼논 당상 인줄 알고 치고받고 난리부르스다. 한심하다 못해 측은해 보인다.

이럴 때면 꼬박꼬박 냈던 연금회비를 돌려받고 전학 가고 싶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러지도 못한다. 아니면 외국인 학교에서 전교회장 해 봤던 놈을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다.

전교회장 자리에 앉혀놓으면 그 나물에 그 밥이지만 이번 전교회장은 누가 될까? 지난번 결과처럼 전교회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닐 게다. 선거 전날까지 대한국민학교에서는 개그 콘서트나 거침없는 하이킥이 계속될 성 싶다. 쭈~~~욱.

2007-06-28

지조, 여자만 있다?

병자호란 때 놈상은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전쟁터에 나갔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반가운 얼굴 대신 놈상을 기다리는 건 그미가 끌려 갔다는 소식. 놈상은 연인이 풀려나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미는 돌아오지 않았다. 소식도 알 수 없었다. 북한산 자락에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풀려 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여인들이 모여 살았다. 놈상은 북한산 자락을 떠돌며 그미를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

놈상은 북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고 돌아올 그미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 지금도 그미를 기다리며 서있다. 사람들은 그 바위를 사모바위라 부른다.

망부석 여인은 남편을 기다리고, 사모바위 놈상은 애인을 기다린다.

2007-06-24

노무현 대통령의 최대 업적

하늘에 계시던 대통령 각하를









땅으로 내려 놓았다.
다시 하늘로 올라 갈 수는 없다.
이제 사람들은 우러러보는 하늘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가카(閣下)를 가카(脚下)로 만들었다.

2007-06-23

금강산과 국립공원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계곡에 몸 전체를 담그면 자연공원법에 따라 2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공지를 발표했다. 지정된 장소 밖에서 야영하면 50만원, 취사행위와 쓰레기 투기는 과태료 10만원이다. 요즘도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있으랴 마는 작년 7~8월에 301건이 적발됐고 그중에 10건이 계곡에서 목욕이나 세탁한 경우란다. 주의를 주거나 계도한 것을 합치면 더 많았을 것은 뻔하다.

요즘 산행을 하면 나부터가 조심하게 되고 의식수준도 많이 높아져 예전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행위를 목격하기는 쉽지 않다. 정말 산을 좋아해서 산에 오르기 때문에 무척 아끼고 폐를 안 끼치려 한다. 그런 발칙한 행위를 뻔뻔스럽게 저지르고 있는 놈들은 뜨내기들일 게다. 단속하려고 하면 언성부터 높이고 왜 나만 잡고 그러냐고 엉길 게 분명하다. 이런 씨방새 같으니라고.

2004년 9월 초 금강산 관광을 했을 때다.

통일 전망대에 있는 남측 출입사무소에서 수속을 마치고 휴전선을 넘어갈 때 모두가 긴장해서 말들이 없어지고 지시에 고분고분 따른다. 이동중 사진촬영은 물론 휴대전화 사용도 안 되니 가방 깊숙이 집어넣는다. 미국 잔재인 청바지 차림은 출입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운전기사의 말에 몇몇은 큰소리 한 번 쳐 보지 못하고 전전긍긍. (후에 알았지만 초창기에는 그랬다고 한다.) 주민등록증이 없어 운전면허증이 있음에도 여권을 가지고 온 양반도 있다.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을 받는데 남측 사무소와 달리 모두가 조용하다. 인민군이 입국심사를 하고 있고 사방에 부동자세로 서 있으니 기가 죽을 수 밖에. 팽팽히 흐르는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불안감. 노인네 어린애 할 것 없이 모두 끽소리 없이 지시에 잘 따른다. 줄을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고 인원파악을 위해 일련번호를 부르라면 부르고. 사람들로 북적대지만 조용하고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산에서는 흡연이 일절 금지돼 있고 도중에 볼일을 보려면 지정된 유료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출입금지 선을 넘어 가서는 안된다. 몇 시까지 관광을 마치고 이곳으로 모여라. 북측 안내원과는 민감한 대화는 하지 말 것이며 음식물 휴대도 하지 마라.

이런 금지사항이 많음에도 이를 어기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관광은 자유스럽게 즐길 수 있지만 중간 중간 안내원들이 있어 가벼운 제재를 하기도 하고 도가 지나치면 큰일 날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는 나이불문 지위불문. 지킬 걸 지키면 모두가 편안하게 관광을 즐길 수 있다.

말로만 들었던 옥빛 물결.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산행길. 너무나 자연적이어서 신선의 세계에 들어 온 듯한 풍경. 형언할 수 없는 감동. 저녁 식사를 하며 흥겹게 북한 소주를 마셨지만 취하지가 않는다. 예전 시골에서 마셨던 막소주보다 더 썼지만.

1박 2일 일정을 마치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자 긴장이 슬슬 풀어지기 시작하려는 순간 갑자기 버스가 섰다.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는데 단체로 남측을 향해 움직이던 버스 중 한 대에서 이를 어기고 촬영을 한 놈상이 있어 지금 검문 중이라는 것이다. 그 놈상 덕분에 관광버스 30여 대가 꼼짝없이 사십여 분을 묶여 있었다. 휴전선을 넘어서자 소주를 마시기 시작하고 노래를 부른다. 도착한 남한 출입사무소는 난리다. 어제 북쪽 상황과는 정반대. 왜 통과시켜 주지 않느냐며 고함이 들리고 취기가 오른 어떤 관광객은 직원과 대판 싸우고 있었다. 신선 세계에서 노닐다 온 고즈넉한 금강산 여흥은 이내 산산이 부서졌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 등산을 하게 되면 공원관리를 북한에 위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북한 땅이라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겠지만 금지사항은 예외 없이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그런 분위기 반의반만이라도 있으면 씨방새 같은 행위들은 엄청나게 줄어들 게다. 남북교류 차원에서 검토해 볼만한 일이기도 하고 기합이 쑥 빠져서 욕을 바가지로 쳐 먹는 요즘 공무원들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효과도 있을 성싶다.

금강산에서 받은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감동을 느끼시라고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한 번 가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못 지키고 있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2007-06-21

樂書 Life

노블레스 오블리주
냄새나는 또랑에 100원짜리 동전이 빠졌다. 꼬맹이는 울면서 그 동전을 꺼내 달라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전을 건지는데 200원의 비용이 든다.

손해나는 장사가 뻔하니 또랑에서 꺼내는 것을 포기하고 주머니에서 100원을 끄집어 내 꼬맹이에게 건네주는 사람과 손해나는 게 뻔한 줄 알지만 동전을 건지지 않으면 영원히 그 가치가 사라진다는 걸 알고 망설임 없이 선뜻 동전을 건지는 사람과의 차이

家長
한순간의 최악에 대처하고자 늘 최선으로 존재하는 사람


한 물체의 질량은 다른 물체들의 존재 혹은 그 역사에 대한 표현이다.

Life
if 라도 있으니 그나마 살만하다.

창조력
정해진 예산에서 끝에 붙어 있는 한 자리를 잘라내면 창조력이 발휘되고 두 자리를 자르면 창조력이 폭발한다. - 브라질 꾸리찌바 시 자이메 레르네르 前 市長

萬古不變의 眞理
世上에 공짜는 없다.

욕심
움켜진 손을 놓아야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

2007-06-19

첫인상

올해 107회째가 되는 2007년 US OPEN Golf에서 앙헬 카브레라가 우승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카브레라는 15살이 되던 해 그 당시 아르헨티나가 낳은 세계적인 프로골퍼 에두아르도 로메로가 헤드 프로로 일하던 골프장 캐디로 취직하면서 골프를 시작하게 됐고 남미 출신이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1967년 브리티시 오픈에서 로베르토 데빈센조(아르헨티나)의 우승 이후 40년 만이란다. 더군다나 추격하는 타이거 우즈와 짐 퓨릭(이상 미국.6오버파 286타)을 1타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대회 마지막 날 경기가 월요일 새벽 네 시(한국시간)부터 중계방송을 시작하는 터라 꼼지락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전날 선두였던 배들리가 우즈와 마지막 조로 나서며 무너지기 시작한 초반 3번 홀까지 보다 잠이 들었다. 다행히 낮에 케이블 TV에서 후반부 경기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계방송 도중에 아나운서와 해설자 왈.
"1타차로 경기를 마친 카브레라와 뒤쫓아 오는 우즈나 짐 퓨릭 중 누가 유리할까요?"
"경기가 벌어지는 펜실베이니아주 오크몬트 골프장(파70.7천230야드)은 언더파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카브레라가 우승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카브레라 선수가 1969년생이라고 언급을 한다. 그 멘트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젊게 봐줘도 40대 중반은 돼 보이는데 나보다 어리다니. 짜슥. 내 동생뻘이잖아.

사실 그랬다. 무명에 가까운 카브레라 선수 프로필을 모르니 방송에 나오는 모습만 보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특히 서양인은 외모만 봐서는 연식을 가늠할 수 없다. 물론 같은 동양인끼리도 짐작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2005년 1월 말. 골프에 입문해서 드라이버도 잡아 보지 못하고 7번 아이언으로 똑딱이 연습만 하다 느닷없이 머리를 올리러 간 곳이 필리핀 마닐라였다. 같이 간 일행 분들은 5년이나 10년 연상이었지만 캐디들은 자치기 놀이하는 내 눈치를 더 보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황제 골프를 치고 있으니 그늘집에서 쉬는 시간도 많아 아이스 맥주를 마시며 노닥거리다 일행 중 한 분이 검지 손가락으로 우리를 싸잡아 가리키며 캐디들에게 물었다.

"Hey. Old boy?" (누가 제일 늙어 보이냐?)

일제히 손가락으로 날 가리킨다. 이유가 뭐냐고 되묻자 머리가 하얘서 그렇단다. 헉. 새치가 좀 있기는 하지만 내가 나이가 제일 들어 보이다니. 急OTL

하지만 피장파장이다. 캐디들이 모두 40대로 보였지만 제일 나이 든 아줌마가 30대 초반이고 모두 20대 초중반 아가씨들이란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서로 낄낄대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심리학에 첫인상 3초의 법칙이 있단다. 단 3초면 그 사람을 파악한다고 한다. 카브레라 선수를 보는 순간 오십은 돼 보인다고 넘겨 짚었다. 나이만 가늠한 것이 아니라 고생 끝내고 이제는 출세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정확히 틀렸다. 그동안 PGA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2001년 유럽골프투어 아르헨티나오픈에서 생애 첫 빅리그 우승을 했고 한때 세계랭킹 9위까지 오르기도 했다는 걸 우승기사를 보고 알았다.

첫인상. 참 중요하다. 그렇다고 첫인상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닐 게다. 오늘 처음 본 카브레라 선수를 비롯해 지금까지 만난 분들을 보자마자 그렇게 단정 짓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니 할 말이 없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3초 만에 내 첫인상을 결정했으리라.

하지만 점쟁이 빤쓰를 입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사람을 3초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으랴.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온 이에게서 뜻밖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좋든 싫든 시간이라는 추억을 공유하며 서로 익숙해 지는게 더 좋다. 사람은 더 깊이 사귀어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고 그러면서 점점 friend(친구는 또래라는 뜻이 강해 friend 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가 되어간다.

카브레라 선수 덕분에 오늘 한 수 배웠다. 상대방에게는 좋은 첫인상을 남기도록 온 힘을 다하고 내가 보는 타인의 첫인상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니 속단하지 말라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노력은 하며 살아야지. 보자마자 예쁜 모습만 집어내는 족집게 속성학원은 어디 없을까?

덧. 지난해 초 같이 술 마시던 짱가라는 후배가 바람막이와 보스톤백을 포함해서 골프세트를 홀라당 자기 차에 싣고 나른 뒤부터 TV 중계를 보며 이미지 스윙만 열심히 하고 있는 신세다. 혼마 아이언세트, 다이와 드라이버세트, 퍼터는 히로마쓰모토였는데 아깝다. 자기 중고차보다 값이 더 나가는 풀세트를 들고 튀다니...

2007-06-09

Konglish

대학 신입생 시절 영문과에 다니는 1년 선배에게 물었다.

- 형. 영어를 잘하려면 어떡해야 해?
- 쉬워. 생각나는 대로 그냥 말해

그러면서 가르쳐 준 몇 마디.

실업자(또는 시간많아) : everyday holiday
내가 살게 니가 쏴라 : i buy you pay.
빨리 서둘러 : hurry hurry!
있을 사람 있고 갈 사람은 가라 : is man is, go man go.

요즘도 친구들과는 통한다.

- 요즘 뭐하냐? 바쁘냐?
- 바쁘긴 뭐. everyday holiday야
- 야 왜 이리 늦어? hurry hurry!!!
- 술 마시러 가자. i buy you pay
- 2차 가자. is man is, go man go

공감대가 형성되면 다 통하는 게 영어인가 봅니다.

이런 전투영어를 가르쳐 준 선배이름은 'hotel nin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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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구

2007-06-06

무모한 도전


이 년 전 은행에서 네가 내민 이면지에 나는 인감도장 콱 찍고 넌 지장을 냅다 찍으면서 각서를 썼었지. 그리고 지금부터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려면 적어도 제주도까지는 가야 한다며 굳은 결심을 했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각서의 내용이 너무 가혹하다며 제3조를 추가했었지.

"제3조 상호 합의 시에는 예외로 한다"

우리는 수많은 합의를 했고 그 수만큼 술과 담배를 줄기차게 마시고 피워댔지. 그 후로 이 각서는 도루묵 됐고 채 한 달도 안돼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 맞아. 그날 우리는 술이 덜 깬 상태에서 각서를 썼었어.

난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한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도전이라는 거 안다. 사람이 갑작스럽게 변하면 급사한다는 것도 안다. 2007년 6월 6일부터 나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련다. 정말 내가 술 담배를 하려면 비행기를 타고 나가서 한다. 아니면 국적을 바꿔 이곳을 해외로 만들어 버린다. 무모한 도전이 무한도전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마지막 담배를 피운다.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술과 담배여 아듀.

2007-06-03

박무가네 보이스

몇 해 전 직장 동료였던 한모 차장이 자리에 들렸다가 이면지에 나를 그려줬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악기를 하나 배워 보고 싶던 차에 인사동에 갈 일이 있었고 마침 낙원상가가 근처에 있어 무작정 발길을 돌렸다. 기웃거리며 구경하다 들려서 사 온 것이 색소폰이다. 끝이 꼬부라진 멋있는 놈으로 고르려니 주인장은 초보자에게 너무 어렵다며 알아서 골라 준다. 더 싼 거 없어요? 대만제가 제일 싸다며 그걸로 하겠느냐기에 거금 30만 원을 카드로 긁었다.

딸려 온 초보 색소폰 교본을 보며 마우스피스를 끼워 넣고 바람을 불었다. 소리가 난다. 다음날 회사에서 색소폰을 샀다고 자랑을 하며 올 송년회를 기대하라고 했다. 내가 멋지게 색소폰 연주를 해주겠노라고.

음계 연습을 한답시고 도레미를 손가락으로 잡고 부는 연습을 하다 잘 닦아서 상자에 고이고이 모셔서 옷장 한구석에 세워 놨다. 흐뭇해하면서. 내일부터 연습하지 뭐. 늦게 퇴근하고 저녁 술자리도 잦아지다 보니 그놈을 꺼내 볼 새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지금 그놈은 내방 책상 밑에 가로로 누워있다. 편안하게.

색소폰이 잠든 지 이삼 년 후. 아침 출근버스를 타고 막 정문을 들어서는데 앞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공장에서는 규정속도가 시속 30km로 한정돼 있어 버스가 그 자전거를 뒤따라 가는데 문득 외발 자전거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쇼핑몰에 들어가 탐색을 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바퀴가 하나뿐인데 값은 두발자전거보다 비싸고 무슨 종류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바퀴 크기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초보자가 타기에 쉬운 18인치(20인치 인지 기억이 가물가물)로 결정했다. 허름한 놈으로 고르니 이번에도 대만제가 제일 싸다. 결정을 하자마자 바로 질렀다.

며칠 후 도착한 외발 자전거를 조립하고 안장에 앉아서 균형을 맞춰보니 몸을 가눌 수도 없고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다. 주말에 밖에 나가 난간을 부여잡고 연습을 시작해야지 하며 현관문 앞에 세워 놨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고 그동안 문을 열고 나다니기에 가로거치고 무척 불편했지만 외발 자전거는 처음 그 상태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 년 전인가 이사를 하게 돼서 이삿짐을 다 나르고 외발 자전거를 놓을 때가 마땅치 않아 1층 계단 옆에 세워놨다. 다음날 아침에 내려가 보니 자전거가 없어졌다. 이런 젠장. 자물쇠 없이 놔뒀더니 누군가 재활용품으로 오인해서 들고 갔나 보다. 땅을 한 번도 밟아 보지도 못했고 달라는 사람도 많았지만 몇 년 동안 현관문만 지키던 놈이기에 아까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미안하다 외발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한 차장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쓰윽하고 그려준 것이 저 그림이다. 박씨네 둘째 아들인 것도 알고 있고 한 번 심통을 부리면 막무가내라고 써준 말이다.

참 人生. 앞으로 바르게 잘 살라는 뜻일 수도 있고 막무가내로 살았지만 삐뚤게 살지 않았다는 격려일 수도 있다. 외발 자전거에 올라타 색소폰을 부는 모습이 정말 철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렇게 살고 싶은 게 진짜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2007-06-01

치과 가던 날

어제 오후에 차일피일 미루던 이빨 치료를 하려고 치과에 갔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갔더니 4~50분 기다리란다. 기다리는 거야 이제 익숙한 나이가 됐지만 한쪽 볼탱이를 쥐어 잡고 있는 곳에서 뭐 더 볼 게 있나 싶어 올라오기 전 눈여겨 두었던 지하 서점으로 내려갔다.

주중이라 그런지 한가하다. 책을 고르는 손님들이 치과에서 대기하는 환자 수만큼도 안돼 보인다. 바람 나오는 송풍구 밑에 서 있으니 시원한 게 벌써 피서 온 느낌이다.

이리저리 구경하다 세 권의 책을 골랐다. 정확히 말하면 한 권만 고르고 두 권은 찾지를 못해 매장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흔이 넘어가니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래서 골라잡은 것이 '나는 마흔이 좋다.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과 '말랑~말랑 여의도 보고서'는 진열대에서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아 찬스를 사용했다.

"이런 책하고 이런 책이 어디 있어요?"

매장 담당자는 단번에 책을 찾으러 가는 게 아니라 컴퓨터 앞으로 가더니 검색 찬스를 쓴다. 재고가 있는지 확인하고 책꽂이로 향한다. 몇 분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한 뒤 한쪽에 있던 선배인듯한 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지인 찬스를 쓴다. 이런 두 번의 찬스를 쓰다니... 고참 언니는 책 제목을 말하자마자 순식간에 찾아서 내 앞에 선다. 허걱. 이렇게 빠르다니. 소림사로 치면 이마빡에 점이 9개 정도는 고수일 듯싶다.

지난 4월 말에 은행에 갈 일이 있어 그때도 대기시간을 이용해 서점에서 사 온 책이 댓 권 있지만 다 읽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책꽂이에 꽂아 두면 언젠가는 읽을 것이고 행여 내가 읽지 못하고 지나간다 하더라고 누군가는 책을 보리라. 인터넷으로 주문을 많이 하지만 때로는 서점에 가서 책장을 넘겨 보기도 하고 표지 앞뒷면을 살피며 고르는 책은 더 애착이 간다. 계산을 마치고 총총걸음으로 서점을 나오니 진료 시간이 얼추 다 됐다.

이빨은 시큼시큼하지만 살랑살랑 흔들리는 책봉투를 들고 집으로 가는 날은 기분이 흐뭇하다. 통닭을 사 들고 가는 것과는 또 다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