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5-30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수필 ‘오월’의 마지막 부분이다.

-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
-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인연)
-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晩年)

한국 수필의 아버지 금아 선생이 향년 97세로 25일 별세했다.

영문학자의 길을 걸었던 금아 선생의 글은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라고 '수필'에서 밝혔듯이 맑고 정갈하다. 영문학자의 길을 걸었으면서도 번역투나 고어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70년대 중반 이후 "잊혀졌다고 생각하고 섭섭해서 별것들을 써내는데 옛것보다 못한 것들이야. 차라리 가만히 있는게 나아" 라며 수필 창작 활동을 멈추었다.

금아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오래전에 읽었던 '수필'을 꺼내 들고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본다. 떠남과 보냄의 미학이라는 금아 작품에 대한 해설을 보며 선생과 아사코를 생각하니 새삼스레 추억에 잠긴다. 금아 선생은 사랑을 하고 가셨다.

내 책꽂이에 있는 '수필'은 1996년(3판 6쇄 발행/범우사) 판이다. 오늘은 십여 년 전 '수필'에서 향수를 느낀다.

그렇게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2007-05-26

이별

사랑한 만큼
사랑할 만큼
시방 그들은
돌아서서 걷는다

찰나의 기다림
억겁의 만남
그 한 점에서
다시 만나려고

2007-05-16

기계공학은 국가대표도 있다

며칠 전 요즘 애들은 이공계로 진학을 꺼린다는 화두가 나왔고 왜 그런지 원인과 처방에 대해 서로 두서없이 떠들었습니다. 정말 요즘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각한가 봅니다. 그에 대한 해결방안도 많이 회자되고 있고요. 80년대 학번인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구요. 아마 90년대 이후부터 생긴 현상인가 봅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이과 계열에서 대학에 진학한다고 하면 앞뒤 잴 것 없이 공대였으니까요.

공과대학에 입학하고 학교생활에 적응될 무렵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집에 자리 잡았던 어느 날. 우연히도 탁자에 둘러앉은 친구들이 모두 공돌이였습니다. 막걸리 사발이 오고 가다 보니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면서 자기 학과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답니다.

-건축과가 최고야. 검사, 판사, 의사처럼 공돌이 중에 유일하게 士자가 붙는 사람이 건축사야. 그림 그리는 공돌이 봤어. 우리는 예술을 공부하고 있어
- 웃기지 마. 우리 과는 기전철학과야. 전기가 눈에 보이니. 손으로 잡을 수 있어. 하지만 존재하잖아. 우리는 그 존재를 공부하는 철학자야. 니들이 철학을 알아?
- 기전철학과 좋아하네. 정전이나 안되면 다행이지.
- 토목공학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 civil engineering. 씨발 엔지니어링이 아니고. 우리는 문명을 만드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없으면 니들도 없어. 확 뽈대(pole)로 그냥.

이제 내 차례가 왔습니다.

- 기계공학은 3대 학파가 있어. 그리고 그중에 한 학파는 국가대표도 있어.

국가대표라는 말에 모두가 귀를 쫑긋한다.

- 기계가 왜 망가지는지 알아보려는 기계심리가 있고, 쇠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탐구하는 기계철학이 있어.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계속했다.

- 그리고 나라에서도 인정한 국가대표가 있지. 바로 기계체조야.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공돌이가 바로 기계체조야. 쨔샤.

모두가 그렇게 우스개 소리로 끝났지만 공대에 입학했다는 것은 취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죠. 그런 면에서 나는 그까이 거 대충 공부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요즘 친구들은 공부도 똑소리 나게 하고 영어도 잘합니다. 이런 친구들이 꿈을 펼 수 있는 시대가 오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계신 힘 깨나 쓰시는 분들은 통첩하시길 바랍니다.

그때 생각하며 요즘도 가끔 써먹습니다. 기계공학은 국가대표도 있다.

2007-05-15

사회공적(社會公敵) 이론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세 가지 부류의 사회공적이 있다.
1. 무식한 사람이 전문직에 앉아 있는 경우
2. 무식한 사람이 소신을 갖고 있는 경우
3.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한 경우

사회공적의 첫 번째 부류는 무식한 놈이 전문직에 앉아 있는 경우다. 이들의 취임사를 들어 보면 "이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고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이러한 중책을 맡게 되어 어깨가 무거움을 느낍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무사히..."라는 것이다. 이 취임사의 요점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여 보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통 모르겠다. 너희들만 믿는다. 재직하는 동안에 큰 실수나 없었으면 한다."는 뜻이 아닌가? 이를 듣고 놀라고 걱정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칭찬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래도 그 사람은 겸손하쟎아."

사회공적의 두 번째 부류는 무식한 놈이 소신을 갖는 경우다.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 소신을 갖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만일 소신이라도 없었으면 모르는 것은 주위에 물어 보고, 본인이 몸소 배우기도 하고, 상대방과 대화라도 잘될텐데, 일을 하는 과정에서 모르는 일만 생기면 곧 소신론을 들고 나선다. '소신'이라는 말의 뜻은 "누가 무어라 해도 나는 이렇게 하겠다. 나는 비장하다"'일 것이다. 무식한 소신파는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점을 깨닫는 경우에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소신을 자주 바꾸는 사람을 보았는가? 실수도 보완대상이 아니다. "소신껏 추진하다 보니 다소 부작용이 있었다."라고 하면 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위험한 사람을 우리들은 좋게 평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래도 그 사람은 소신은 있잖아."

세 번째 부류는 무식한 놈이 부지런한 경우다. 중요한 자리에 사람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최상의 선택은 전문식견이 있는 사람에게 중책을 맡기는 길일 것이다. 이것이 어려울 때에는 무식하면서 게으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맡기는 것이 차선의 방책이다. 게으르다보니 하는 일도 적어서, 저지르는 실수도 자연 줄어들 것이 아닌가? 가장 최악의 선택이 무식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에게 중책을 맡기는 경우다.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하면 어떤 현상이 야기되는가? 건드릴 것 안 건드릴 것, 갈 곳 안 갈 곳, 끌어들일 것 안 끌어들일 것 쉬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사고를 저지를 것이다.(86쪽)

신사고 이론 20/이면우/삶과꿈 19970731 200쪽 5000원

2007-05-10

박대통령의 4가지 실책

박대통령에게는 다음 4가지 아쉬운 실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4가지 실책만 없었다면 그는 세종대왕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지도자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첫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유신헌법을 만든 점이다.(중략)

둘째,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후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영·호남 대립을 조장하고 심화시켰다는데 있다.(중략)

셋째, 제주도를 제대로 개발하지 못한 점이다.(중략)

제주도 개발은 우리나라 발전을 10년 앞당길 수 있을 만큼 큰 기회였다. 국가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을 때 개발해야 했는데, 그 시기를 놓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중략)

넷째, 국제화 시대에 영어교육을 생활화 하지 못하도록 한 점이다. 한국전쟁 후 우리가 가난하고 허기가 져서 미군부대를 뒤져가며 배를 채울 때 우리에게는 의욕과, 도전의식과,살아남아야 한다는 강인한 인적자원밖에는 없었다.(중략)

옛날 박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쓸데없는 국민교육헌장이나 달달 외우게 하지 말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국어와 병행하여 영어공부를 시키고 고등학교부터는 본격적으로 영어로만 강의하며, 영어 실력이 부족하면 대학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해야 했다. 이러한 것이 요즘과 같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그 당시 모든 국민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역량과 국민적 힘을 모을 수 있었던 사회분위기에서는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었다.(중략)

지금이라도 시작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제는 늦었다. 민주화 시대에 반발이 너무 세어 강제로 시킬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먹고 살만해졌으니 강제로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사는 집 아이에게 강제로 공부를 시키면서 초일류 과외를 붙여준들 큰 효과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국가 정책에는 반드시 적시와 적소가 있는 것이다. (300쪽)

대한민국리더십/정규준/다밋 20070301 319쪽 12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