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15

코끼리가 대학을 못 가는 이유

이십여 년 전 여름날. 영월 역전에서 열차를 기다리다 한 초딩과 얘기를 나누던 중 그 아이 왈.

- 아저씨, 코끼리가 왜 대학을 못 가는 줄 아세요?

아니 뭐 이런 뚱딴지같은 질문이 다 있나. 잠시나마 코끼리는 왜 대학을 못 갈까 내심 궁금하기도 하고 그 답을 찾을 요량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도통 모르겠더이다.

- 왜 못 가는데?

빙긋이 웃으며 그 꼬마가 하는 말.

- 고등학교를 못 나와서요. 그것도 몰라요.

아하. 그렇구나. 참 간단명료한 답인데 미처 깨닫지를 못했다. 이미 세상 물정에 닳아 버린 나는 그 짧은 순간이나마 해답을 찾으려고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순수하게 생각하는 꼬마 같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요즘도 그때 생각이 나서 코끼리만 보면 요놈은 대학을 갈 수 있는 놈일까 궁금해지며 시나브로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2007-04-09

회사 때려 칠까 보다

"정말 불만이야"

반쯤 남은 소주를 한 잔 털어 마신 뒤 그가 말을 이었습니다.

"회사가 말이야.
돈은 쥐꼬리 만큼 주지.
상사란 놈은
걸핏하면 화만 낸다구.
인사평가도 불공평 하고...
자기들 끼리 다 해먹어요.
그래서 말인데..
나 형네 회사 가면 안될까?"

그가 내게 이런 불만을 얘기한건 처음이 아닙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제로백 5초 짜리 성능 좋은 스포츠 카.
인텔듀어코어2 최신 사양의 컴퓨터 한대.
성능은 쓸만한데 딱히 쓸일없는 믹서기
테이프를 씹어대는 낡은 비디오플레이어
몸에 유해하다고 보도된 구형 정수기...
음..또 뭐가 있을까.
아무튼 좋아 일단 여기까지.
니 재산이 이렇게 다섯개 밖에 없다고 치자.
넌 그 중에
어떤 물건에
애정과 돈과 시간을 쏟아 관리할 것 같냐"

"당연히 스포츠 카지."

"좋아 그런데 만일 그 기계들이
희로애락, 서운함을 느끼는 생명체라고 치자
누가 너한테 제일 앙심을 품고 불만이 있겠냐"

"…."

"니가 바로 정수기야."

"형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만
이건 나 혼자만 느끼는게 아니야
내 옆사람도…또 ..그 옆사람도"
저는 잔을 덮고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맞장구 치는 니 주변은
믹서기하고 비디오 플레이어 투성이일 테니까"

헌트블로그

2007-04-03

서시(만약에) - 조은지

신이 내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면
그런다면
이 세상 사는 동안 갖고 싶은 추억 하나 있습니다

서삼릉 입구에 가면
아름드리 미루나무 가로수가 늘어선
길고 좁은길 있습니다
투명한 가을 하늘 속에 숨겨져 있는 생각들
하나 하나 꺼내 이야기하며
떨어지는 낙엽 속으로
그대와 그곳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그 길 혼자 걸을 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저녁 노을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바람도
그리고
나도
늘 주문처럼 그대의 행복을 기도합니다

달을 따라 이 길을 그대와 걷는다면
길가에 한 식구로 모여 사는 갈대나
봉숭아 꽃잎 같은 표정으로
은밀히 우리들의 뒤를 따라오던 낙엽도
눈 껌벅이는 참새와 함께
날 보며 기뻐해 주지 않을까

그대와 그곳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그대 잊기로 한지 두달이 지났습니다/조은지/자음과모음 20010115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신 때문에
이마저 추억이 되고 시가 되었다.
기억 못 하는 추억마저도
모두 행복하시라.

2007-04-01

진달래

영취산에 진달래가 만발했어요
남녘이 전한 봄소식
그는 아직 겨울 보충수업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입춘과 같이 날아든 문자
불량문자가 아니길 빕니다.

모퉁이를 돌아앉은 파전집
지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허벌나게 매운 닭발들

그미에 맞는 안주 쓰러진 소주병
죽이 맞는 대화는 과거로 흐르고
그나저나 괜찮은 사람 사람들

습격당한 키스와 별을 보는 눈동자
지루한 침묵이 흐르는 눈빛
꿈이 아니길 바랍니다.

우린 정말 사랑했나요?
모서리마다 비치는 단편들
모자이크처럼 기억을 채운다.

미안해요 아듀
과거로 보낸 마지막 문자
가위로 싹둑 끊은 인연들

영취산에 진달래가 만발했어요
돌아서는 마지막 말처럼 피어난 진달래
굽이굽이 헤치며 오른 산등성이

떨어진 꽃잎마다 꼬박꼬박 사랑을 밟고
그 자국 자국마다 눈물 흘리는 사연
밟을수록 떠오르는 추억들

우리 정말 사랑했나요?
떨어진 꽃잎은 그냥 웃고 있지요.
사랑 혹은 추억처럼